The Economic Walk by Joo Money

‘The economic walk’ with reporter, ‘Joo Money,’ from RGO 24… He picked up a pen and began to write to testify for God’s Providence history through economics by becoming a living book of economics. Would you like to walk with the Lord on Heaven’s beautiful, mysterious economic walking tr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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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선을 넘어 말씀의 인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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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안 넘어. 그런데 냄새가 선을 넘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나오는 동익(이선균 분)의 말이다. 동익은 본인의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를 운전기사로 대변되는 특정한 집단에 투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사실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그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다. 중국 우한에서 발원하여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중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에 대한 혐오감이 커져가고 있다. 마치 ‘아시아인은 야만인’이라는 낙인을 찍은 듯 전 세계 많은 곳에서 아시아인이 자국의 경계선을 넘는 것을 꺼리고 있다. 기생충과 바이러스는 전혀 다른 존재이지만 사실 숙주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마찬가지로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으로 전 세계인의 찬사를 받고 있는 반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면서 분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지만, ‘인간에 대한 혐오’라는 이슈를 공통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영화 ‘기생충’과 코로나 바이러스는 서로 닮아 있다.


그렇다면 혐오는 무엇인가? 사실 알고 보면 혐오라는 감정은 오물이나 배설물과 같이 역겨운 대상이나 어떤 질병이나 병원균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본능적인 생물학적 반응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란 존재가 이러한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반응을 특정한 집단에 투사하기도 한다는 점에 있다.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대표적인 사례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이 독특하고 불쾌한 냄새가 생리 중인 여성의 냄새와 유사하다며 그들이 오염원의 속성을 가진다고 덮어씌웠다. 심지어 기차를 타고 긴 여정을 떠나야 하는 유대인들이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 승객들 앞에서 대변을 보게 만듦으로써 나치로 하여금 유대인이 혐오스럽고 인간도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혐오라는 감정이 오염원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려는 원초적이고 생물학적인 기능을 넘어 사회적인 차별과 배제, 억압의 기제로 확장되는 것일까? 그 원인은 인간의 뇌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뇌는 미워하는 대상을 보면 ‘시상하부’라는 곳이 활성화되는데, 그곳은 공격적 본능을 자극하여 미워하는 대상과 나를 구별짓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한다. 즉, 우리 뇌는 어떤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꼈을 때 자연스럽게 그 대상을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혐오라는 감정은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혐오라는 감정의 스위치가 켜지고 나면 구별짓고자 하는 어떤 특정한 대상의 위험이 얼마나 큰지를 합리적으로 평가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혐오라는 감정은 구별지어진 대상과 나와의 경계선을 강화하려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단지 그 대상이 선을 넘었는지 여부만 따지도록 만든다. 코로나19를 막기 위해 중국인 전체를 입국 금지하는 것이 타당한지, 전면 봉쇄를 했을 때 유발되는 문제는 무엇인지에 대한 평가는 우리의 뇌에서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2016년 세계 곳곳에서 불길처럼 번졌던 이민자에 대한 반감과 혐오, 배척만 보더라도 그것이 타당한 사실관계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단지 이민자들이 기존의 일자리를 빼앗고 안전 문제를 위협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사람들의 뇌를 지배하면서 이민자들을 배척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당시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연구팀에 따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민자의 수를 과대평가하고 이민자들이 저숙련 노동자들이며 대학교육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등 편향된 믿음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그만큼 혐오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할 때 우리는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코로나19와 같이 사회적 불안정성이 커질 때 안전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안전에 대한 정당한 요구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요구가 타인의 안전과 권리를 배척하게 될 경우 ‘저들이 사라져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극단적인 사상으로 번져갈 수도 있다. 이 경우 부당하게 모든 책임을 전가당하는 피해자 집단이 만들어지기 마련이고, 근원이 되었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요원하게 된다. 중국인을 미워하고 혐오한다고 해서 코로나19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이러한 사회 기류에 편승하여 일부 정치인들은 특정 대상을 혐오자로 낙인찍고 그들을 쫓아내야한다는 극단적인 논리를 내세우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코로나19에 대한 백신과 치료법이 개발된다고 할지라도 혐오라는 전염병에 대한 백신은 개발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혐오가 하나의 논리와 이데올로기로 발전할 수도 있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 흑인에 대한 혐오가 그랬듯이.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인디언...열 꼬마 인디언, 열 꼬마 아홉 꼬마 여덟 꼬마 인디언...한 꼬마 인디언’이라는 미국 동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동요가 아이들에게 숫자를 가르치는 노래 정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노래의 원작은 ‘열 꼬마 흑인(Ten little niggers)’이었다. 인종차별적 단어 때문에 흑인에서 인디언으로 바뀐 것뿐이다. 그리고 노래에서의 가사처럼 흑인들은 한 명씩 사라져간다. 여러 가지 사유로 한 명씩 죽어 없어져가는 흑인들의 모습을 노래한 것이다. 흑인에 대한 혐오가 만연했던 시절이기에 이러한 노래가 자연스럽게 불릴 수 있었다. 만일 코로나19가 되었든, 또 다른 이유가 되었든 인간에 대한 혐오가 극단적으로 퍼져나간다면 이러한 류의 노래는 다시 불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혐오가 갖는 파급력은 크다.


앞에서 언급한 뇌의 시상하부는 미워하는 대상으로부터 우리를 구별짓는 속성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 부분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발생하기도 한다. 즉, 우리 뇌는 어떤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꼈을 때 자연스럽게 그 대상을 배척해야 할 대상과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구별짓는 속성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배척해야 할 대상은 미워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감싸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이처럼 배척과 포용, 혐오와 사랑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감정이 우리 뇌 안에서는 같은 곳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언제든 혐오를 사랑으로, 사랑을 혐오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정명석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을 사랑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인을 받은 자들은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다. 또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 때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과 함께 이 기회에 나쁜 생각과 행실을 우리 삶에서 아예 제거해버리자고 하셨다. 무엇이 나쁜 생각인가? 무조건적인 배척과 혐오의 감정으로 현 사태를 바라보는 것도 그 중 하나이지 않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 혐오의 감정으로 창녀에게 돌을 던졌던 유대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다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는 돌직구가 자신에게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말씀처럼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삶을 더욱 성숙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할 때다. 그것은 혐오라는 감정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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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2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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