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conomic Walk by Joo Money

‘The economic walk’ with reporter, ‘Joo Money,’ from RGO 24… He picked up a pen and began to write to testify for God’s Providence history through economics by becoming a living book of economics. Would you like to walk with the Lord on Heaven’s beautiful, mysterious economic walking trail?

칼럼_연재칼럼_The Economic Walk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귀하게 사용하여 정의를 바로 세우자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법무부 청사 입구에는 ‘Justice alone sustains society’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오직 정의만이 사회를 지탱한다’는 뜻이다. 즉, 정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지 않는 한, 어떤 위기와 위험이 발생해도 사회는 지탱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문구의 의미와 달리 현재 미국에서는 인종 차별에 대한 항의와 시위가 빗발치고 있다. 지난 5월 25일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시위다. 많은 미국인들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조지 플로이드에게 정의를(Justice for George Floyd)’이란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거리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의 대법원에는 정의를 상징하는 여신상 ‘디케(Dike)’가 세워져 있다. 정의의 여신상을 보면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데, 저울은 권리 관계에 대한 다툼을 공정하게 해결하라는 의미이고, 칼은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자에 대한 제재를 뜻한다. 또한 정의의 여신상은 두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는데, 이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어느 쪽에도 기울이지 않는 공평무사한 자세를 지키라는 의미다. 그만큼 정의는 공정함과 연결되는 가치이고, 서구의 법은 그러한 공정함이라는 가치를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동양도 마찬가지다. 한 예로, 조선시대에는 법으로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관청인 사헌부에 ‘해치’라는 동물을 세웠다. 해치는 예로부터 선악을 구별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해치는 분란이 생긴 현장에서 어긋난 행동을 한 사람을 골라 뿔로 들이받고, 들이받아도 그 죄를 다 사하질 못할 정도의 중죄인은 뿔로 공격한 후 먹어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사헌부 판관들은 해치 무늬를 수놓은 관복을 입고 두건을 머리에 썼다. 오늘날 국회의사당과 대검찰청 앞에도 해치상이 있다.


그런데 현대 사회의 정의는 슬프게도 우리 곁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비단 미국의 플로이드 사건이 아니더라도 정의가 강자의 이익과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많은 국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지강헌’의 인질극에서 언급되었던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구다. 지강헌은 556만 원의 절도죄로 17년의 형량을 선고받았지만, 같은 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은 공금 73억 6천만 원 횡령, 10억 원 탈세, 4억 원에 달하는 불법 이권 개입에도 불구하고 7년형을 선고받았고, 그것도 모자라 3년 만에 가석방되고 이듬해 대통령 특사로 사면 복권되기까지 했다.



고작 빵 하나를 훔쳤다는 이유로 19년의 형량을 선고받은 장발장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만큼 힘과 권력, 돈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보이지 않은 차별로 정의가 훼손되고 있는 현대 사회인 것이다. 2012년 개봉되었던 영화 <7번방의 선물>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억울한 누명을 쓴 바보 아빠의 딸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보다는, 그 바보 아빠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조작의 희생양이 되어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는 소위 ‘사법살인’을 당하는 장면으로 사회 현실을 고발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영화관으로 향한 것이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정의에 대한 결핍을 체감하고 있고, 공정함과 정의에 대한 열망 또한 높아져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정명석 목사님도 그 동안 정의롭지 못한 사법부를 비롯하여 이 사회에서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수없이 당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명석 목사님의 신앙과 삶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항상 가득 차 있다. 목사님은 <삼위는 귀하게 써야 귀한 것을 주신다>라는 주일말씀을 통해 항상 감사하고 사랑하였더니 더 귀한 것을 주신다는 본인의 간증과 함께, 그와 같이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것의 가치를 깨닫고 주신 것을 귀하게 써야한다고 강조하셨다. 온 지구를 하나님이 90% 이상 도와주시고 계시기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도 만물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시며, 생명을 귀하게 여기면 귀한 생명들을 계속 보내주시고, 만물을 귀하게 여기면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월명동 자연성전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잡초가 우거지고 그 아름다움과 신비함과 웅장함도 사라졌을 것이라며, 완전한 자에게는 완전함을 보이시고, 사특한 자에게는 사특함을 보이시며, 인색한 자에게는 인색함을 보여주시는 하나님, 행한 대로 대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재차 강조하셨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함으로 우러나온 내면의 진실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스러져가는 정의를 올곧게 세워주는 말씀이 함축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보통 윤리적 측면에서의 정의는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하는 것이고, 사회적 측면에서의 정의는 인종, 성별, 신분, 출생지에 관계없이 누구나 공정하게 대우받아야 함을 말하며, 경제적 측면에서의 정의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 결실을 얻을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정명석 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며 윤리적 측면에서의 정의를 제시하고 있고, 또한 인종, 신분에 관계없이 그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신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만큼 더 귀한 것을 주시는 사회·경제적 차원에서의 정의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당신께서 직접 실천함으로 이루어진 엄연한 사실이기에, 그 말씀이 누구에게나 이루어질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오면서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상처받고 좌절한 이들을 치료해주기까지 한다.


사실 정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의가 이긴다는 말이 늘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옳지 않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 그만큼의 노력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과거 흑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에 저항했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은 헌법과 독립선언서에 모든 미국인이 상속할 약속어음에 서명을 했고, 그 어음은 백인뿐 아니라 흑인에게도 모두 양도할 수 없는 생명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을 보장해 주는 그런 약속이었다면서, 그러한 약속어음을 현금으로 바꾸어 줄 정의의 은행이 파산했다고는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사는 긴 호를 그리지만, 결국에는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그의 바램대로 정명석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적 정의를 이루는 사회로 휘어지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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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6/1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