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conomic Walk by Joo Money

‘The economic walk’ with reporter, ‘Joo Money,’ from RGO 24… He picked up a pen and began to write to testify for God’s Providence history through economics by becoming a living book of economics. Would you like to walk with the Lord on Heaven’s beautiful, mysterious economic walking trail?

칼럼_연재칼럼_The Economic Walk

깨달음의 희열과 방향

기원전 3세기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를 다스렸던 히에론(Hieron) 왕은 어느 날 금 세공사에게 금덩어리를 건네주며 왕관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왕관이 도착했는데, 당시 세간에는 세공사가 금의 일부를 빼돌리고 은을 섞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히에론 왕은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를 불러 진실을 규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떻게 하면 왕관에 섞인 은의 함량을 규명할 수 있을까 골몰하던 아르키메데스는 우연히 공중목욕탕의 욕조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체중과 같은 부피의 물이 욕조 밖으로 넘치는 것을 보고, 문득 금과 은의 밀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용해 왕관의 순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원리를 깨달았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유레카(알았다)!” 라고 외치며 알몸으로 뛰쳐나왔다.


사실 이 이야기는 아르키메데스가 사망하고 난 후 200년쯤 뒤 로마의 건축가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를 통해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까지 ‘유레카’는 깨달음의 순간을 나타내는 문구로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문구다. 그만큼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오는 희열은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기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에라스무스는 ‘끝없는 기쁨’이라고 표현했고, 바그너는 ‘하늘의 선물’, 베토벤은 ‘행복 그 자체’, 간디는 ‘나를 사로잡고 뒤흔드는 대사건’, 링컨은 ‘감각과 감성을 단번에 사로잡는 영원한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깨달음은 아르키메데스의 사례와 같이 어떤 것의 원리나 비결을 알아냈을 때 쓰이는 말이기도 하고, 종교나 철학에서 주로 마음의 평화나 번뇌에서 해방되는 경지에 도달한 상태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개 학문적 깨달음은 오랜 시간 생각과 고민의 시간을 거쳐 이루어지는 반면, 성찰적 깨달음은 어렵고 힘든 시기를 겪은 후에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소설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램프를 만들어낸 것은 어둠이었고, 나침반을 만들어낸 것은 안개였고, 탐험하게 만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그리고 일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의기소침한 나날들이 필요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부족과 결핍, 고통과 실패가 인생의 깨달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경제적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이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고 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1,400만명 이상이 감염되었고, 6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삶의 방식과 의식이 바뀌는 것은 물론이고 많은 이들이 좌절을 겪고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러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같은 부정적 깨달음이 미래를 수놓을까 두렵기까지 하다.



사토리 세대란 일본에서 198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나 불황 속에 자라온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사토리란 ‘깨달음, 득도’를 뜻하는 말로, 안분지족하는 법을 깨달은 세대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1990년대 이후 계속된 불황으로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면서 소비에도 관심이 없고, 필요 이상의 돈을 벌겠다는 의욕도 없고, 연애나 결혼도 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욕망하지 않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안분지족은 잃어버린 20년의 경험을 통해 욕망해봤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생긴 일종의 자기방어적인 깨달음이다. 즉, 자발적으로 도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경제적 환경이 득도하도록 강요당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 깨달음의 방향이 매우 부정적이다. 불경기밖에 경험하지 못하다 보니 스스로 적게 욕망하고 그 좁은 틀 안에서 만족하는 것에 익숙해진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만일 지금과 같은 코로나19 사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어쩌면 우리도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같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삶의 활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명석 목사님을 통해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삶의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주셨다. ‘깨달아라’는 말씀을 통해 목사님은 성경의 요한 계시록 9장 5절에 나온 다섯 달 동안 괴롭게 한다는 말씀을 풀어주시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확실하게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순간부터 모든 역사를 실행하시기 때문에 빨리 행하는 것의 중요성과 함께 순간에서 성공이 좌우될 수 있음을 강조하셨다. 그러면서 오히려 코로나의 해를 맞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정신과 사상이 다이아몬드 같이 강하고 보석같이 빛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울러 모든 것은 성삼위가 열고 닫으시기 때문에 앞으로 탕감기간이 끝나고 섭리의 중심지인 한국을 중심으로 희망의 역사가 전개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이처럼 똑같은 고통을 겪어도 그 깨달음의 방향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것은 정명석 목사님의 삶이 항상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단순한 지식을 ‘분별지(分別智)’라 하고, 참된 지식을 ‘진지(眞智)’라고 하며 양자를 구별하였다. 한 예로, 나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단순한 지식인 분별지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지식인 ‘진지’를 가지고 있으면 자신이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에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진지는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여 아는 차원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는 차원에서 비롯된다.



그 동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많은 것들이 정지되고 일상이 사라진 후에야 그 동안 만났던 사람들과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고, 마스크를 써본 후에야 너무 쉽게 말했던 언어의 경솔함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대구로 달려간 간호사들과 같이 작은 행동과 실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바이러스와 같은 미물에도 쉽게 쓰러지는 인간의 나약함을 깨달았으며, 가장 큰 바이러스는 코로나가 아닌 좌절과 절망의 바이러스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더해 정명석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인생의 허들경기에서 장애물은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라고 있는 것임을, 그리고 어떤 어려움과 위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불꽃같이 지켜주셨고, 코로나 기간이 오히려 자신을 만드는 기간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는 이러한 깨달음에 더해 더욱 깊은 것들을 깨달아 참된 지식에 이르고, 또한 실천까지 이어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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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7/1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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