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conomic Walk by Joo Money

‘The economic walk’ with reporter, ‘Joo Money,’ from RGO 24… He picked up a pen and began to write to testify for God’s Providence history through economics by becoming a living book of economics. Would you like to walk with the Lord on Heaven’s beautiful, mysterious economic walking trail?

칼럼_연재칼럼_The Economic Walk

종교의 판도를 바꾸는 공력의 말씀

우리 속담에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든 가장 급하고 필요한 사람이 그 일을 서둘러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속담에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공재’의 개념이 숨겨져 있다.



공공재란 어떤 재화를 소비할 때 다른 사람을 배제할 수 없는 특성, 즉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비배제성(non-excludability)’과, 재화에 대한 소비가 늘더라도 기존 소비자의 소비량이 줄지 않는 속성, 즉 각 사람의 소비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비경합성(non-rivalry)’을 지닌 재화를 말한다. 마을의 우물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비배제성과, 아무리 사용해도 마르지 않는 비경합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공공재는 ‘무임승차(free-riding)’라는 문제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무임승차란 공공재를 대가 없이 사용하려는 사람들의 행태를 말한다. 마을 우물의 경우에도 어느 누구도 힘들여 우물을 파려 하지 않고, 목마른 누군가가 우물을 팔 때까지 서로 눈치만 보며 기다리는 무임승차 문제 때문에 우물이 파지지 않거나 우물이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릴 수 있다.



무임승차 문제는 공공재의 대표적인 재화로 거론되는 ‘국방 서비스’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군대가 나라를 지키면서 나만 빼고 지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내가 국방비를 내지 않더라도 나는 국방 서비스를 누리는 데 하등의 문제가 없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생각으로 국방비를 내지 않으면 군대는 절대 유지될 수 없게 되고, 그만큼 사회는 더욱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피해를 볼 때뿐만 아니라 별 상관이 없는 경우라도 무임승차에 본능적으로 분노를 나타낸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소유한 돈의 일부를 무임승차를 처벌하는 데 지출하는 데 쓸 수 있도록 하는 실험을 해보았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자신이 손해를 입더라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선택한 상대방을 처벌하려 들었다. 이를 보통 ‘이타적 처벌(altruistic punishment)’이라고 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분노가 우리 마음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코로나에 대한 방역’도 공공재라는 데 있다. 특정인에게 방역의 효과가 미치지 않도록 배제하기도 어렵거니와, 누군가 방역의 혜택을 본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혜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역도 무임승차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즉, 모두가 마스크를 쓰며 방역에 동참하는 상황에서 ‘나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겠지’라는 무임 승차자들의 행태는 모두의 방역 노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부 교회들이 방역이라는 공공재에 무임승차를 시도하였다. “정부가 교회가 드리는 현장 예배를 어떤 경우에도 막아서는 안 된다”라는 일부 교회들의 주장과 “종교의 자유는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가치”라며 대면예배 금지 요청에 반발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무임승차 행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무임승차를 허용하지 않으신다. 바로 모든 것을 자신의 공력대로 받게 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력이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공들이고 애쓰는 것으로, 공력대로 받는다는 말은 무임승차가 아닌 누구나 노력하고 행한 만큼 받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정명석 목사님께서는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을 풀어주시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신앙생활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셨다.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으로 집을 지을 수도 있지만 나중에 불이 나게 되면 대충 지은 집은 불에 타 없어져 창피를 당하게 되고, 제대로 지은 집은 남아져 영광이 되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평소 신앙관리와 생활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금, 은, 보석으로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로 인해 공의의 하나님께서 공력대로 갚아주실 때 결국은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당신께서도 과거 대둔산에서 기도하실 때 춥고 배고프고 힘들었지만 성자께서는 이 역사는 개인 한 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완전한 행함을 주문하셨다고 했다. 그와 같이 우리들도 성삼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을 전공으로 삼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현재 공력대로 받고 있는 상황들을 깨달으라고 하셨다.


그 말씀과 같이 일부 교회의 무임승차 행위는 그 행위대로 지탄을 받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내세우며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외쳐 코로나 방역에 실패한 미국과 같이, ‘종교의 자유’를 내세우며 ‘대면 예배를 드릴 자유’를 외치는 행위 자체가 코로나 방역에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믿음과 행위를 이성적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사실 무임승차라는 개념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경제적 행위자를 전제한 개념이다. 그러나 “정부의 방역조치는 사기극”이라는 어떤 목사의 비이성적 발언은 무임승차도 아닌 비합리적 믿음과 무지에 가깝다. 과거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일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병원을 탈출해 부족의 주술사에게 치료를 받으러 가는 바람에 사망자가 늘어난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처럼 무지와 맹신, 그리고 무임승차가 결합되면서 방역이란 공공재를 취약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위협이 주로 개신교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종교 역사의 판도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역사가 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l)은 〈전염병의 세계사〉라는 책에서 고대 지중해의 초기 기독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병자들을 돌보는 것을 종교적 의무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이교도들은 병자를 팽개치고 도망가면서 신용을 잃어갔던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면서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방역 공급은커녕 협조도 하지 않으면서 방역에 무임승차하고 자신들의 소리만 높이는 일부 교회들의 외침에 대다수 국민들은 등을 돌리고 있다. 초기 기독교시절 병자를 팽개친 이교도의 모습이다.



그러나 정부의 방역지침을 한 단계 더 높여 따르며 ‘스스로 조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는 섭리사는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방역이라는 공공재를 튼튼하게 구축하는 것을 넘어 더 철저한 신앙을 하게 만드는 ‘자기 공력대로 받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섭리사를 향후 중심 종교로 이끄는 초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공력대로 받게 하시는 성삼위와 주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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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9/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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