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conomic Walk by Joo Money

‘The economic walk’ with reporter, ‘Joo Money,’ from RGO 24… He picked up a pen and began to write to testify for God’s Providence history through economics by becoming a living book of economics. Would you like to walk with the Lord on Heaven’s beautiful, mysterious economic walking trail?

칼럼_연재칼럼_The Economic Walk

죽음의 강과 생명의 강

‘바흠’이라는 농부가 있었다. 땅 한 푼 없이 가난하게 살던 그는 어느 날 돈을 빌려 땅을 매입했다. 다행히 풍작이 들어 바흠은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지주가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땅에 만족하지 못하고 점점 더 많은 땅을 사들였다. 그러다 어떤 상인으로부터 크고 좋은 땅을 가진 한 부족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부족을 찾아간 바흠은 부족장으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는다.



바흠이 하루 동안 돌아보고 올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싼 값에 팔겠다는 것이다. 다만 해가 질 때까지 출발지로 돌아오지 못하면 그의 돈은 몰수되고 한 조각의 땅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말 그대로 밟는 대로 네 땅이 될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이에 바흠은 눈앞에 펼쳐진 비옥한 땅에 매혹되어 내리쬐는 뙤약볕을 맞으며 탈수 상태에 이르면서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해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급한 마음에 출발지를 향해 뛰어 돌아왔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이내 쓰러져 죽어버렸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의 주요 내용이다. 그런데 성경에도 요단강을 건넌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라는 약속을 하신다. 그것은 가나안 복지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요단강을 건너온 여호수아와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선물이었다.


그만큼 요단강은 많은 상징성을 가진다. 선지자 엘리야도 요단강을 건너 하늘로 올라갔다. 때문에 ‘요단강을 건넜다’는 말은 천국으로 갔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일반적인 죽음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곤 한다. 그러고 보니 죽음을 나타내는 다양한 우리말 중에 ‘물 건너갔다’라는 표현도 있다.



이는 ‘삼도천(三途川)’이라는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는 경계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인들은 삼도천을 건너면 저승에 도착했기에 이승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고 믿었다. 그만큼 고대사회에서 물을 건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고대인들은 하늘의 은하수가 강물이라고 생각했다. 견우와 직녀도 은하수를 건너야 만날 수 있지 않은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이 하늘의 은하수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일강을 건넌다는 것은 이승에서 저승의 세계로 건넌다고 보아 피라미드 속에 배를 만들어 미라와 함께 보관했다.



그리스 신화에도 레테(Lethe)의 강이 있다. 레테의 강은 죽은 자가 죽음의 신 하데스가 지배하는 곳으로 갈 때 건너야 하는 다섯 개의 강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망자가 레테의 강물을 마시게 되면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레테의 강은 ‘망각의 강’으로도 불린다. 때로는 레테와 그 어원이 같은 알레테이아(aletheia)가 ‘진실’을 의미하기에 레테는 기억을 없앤다는 의미 외에도 진실을 숨긴다는 뜻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강을 건넌다’는 말이 갖는 의미는 다양하다. 한 예로, 이탈리아 북동부에 흐르는 루비콘 강을 들 수 있다. 이 강은 로마 공화정 말기 이탈리아와 그 속주인 갈리아의 경계였다. 이 강이 유명해진 것은 기원전 49년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가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에 대항해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치며 이 강을 건너면서부터다. 그 이후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표현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된 상황’을 나타내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동양의 주역에도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괘(卦)가 나온다. 이는 ‘큰 강을 건너면 이롭다’는 뜻이다. 즉, 큰 강을 건넌다는 것은 상당한 고비를 겪어야 한다는 의미다. 한 번 큰 고생을 해야만 일이 성취된다는 암시가 숨어 있다. 바로 인생의 고비가 강을 건너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 볼 때 ‘강을 건너다’라는 표현은 죽음, 망각, 돌이킬 수 없는 변화, 인생의 고비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모두 ‘차원의 변화’를 뜻하는 말이다. 바로 강을 건너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그것이 곧 ‘구원’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섭리인들이 모두 기성의 요단강을 건넜다는 정명석 목사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 지녔던 모든 것들을 두고 떠났듯 섭리인들은 기성 신앙뿐만 아니라 물질, 명예, 이성과 같은 세속적인 것들을 버리고 시대의 강을 건너 섭리라는 가나안 복지를 차지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주신 밟는 대로 네 땅이 되리라는 그 약속을 똑같이 이루어 주셨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월명동 자연성전’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담대함이라는 데 있다. 자연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 모든 건축 전문가들은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이라며 회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건축 전문가도 아닌 목사님을 들어 원시인이 살 것만 같은 척박한 땅을 지금과 같은 아름답고 신비하고 웅장한 자연성전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그래서 자연성전은 한마디로 ‘담대의 증거물, 주의 실상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정명석 목사님께서는 이와 같이 모두가 하늘에 속한 담대함을 갖고 살라고 당부하셨다. 담대한 자가 미인을 얻는 것처럼 담대히 행한 자들이 이 시대 신앙의 가나안이라는 미인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담대함은 돈이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은 뇌와 생각에서 일어난다고 하셨다. 진리를 알 때 담대해지고 희망이 있을 때 담대해지는 것이라며, 어릴 적부터 배짱 좋게 신앙에 투자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미래는 어떤 것이 보장된 것이 아니라 하는 대로 희망이 생기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서두에서 말한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의 마지막을 보면, 톨스토이는 이 작품의 제목이 던지는 질문에 답을 말하고 있다. “바흠의 일꾼은 삽을 들고 주인이 누울 무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180센티미터에 딱 맞는 길이로 파서 그를 묻었다.”



땅이라는 물질에 목적을 두고 욕심을 부렸던 바흠의 비참한 말로다. 아마도 바흠은 땅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담대히 강도 건넜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강이 삼도천이 되었고, 레테의 강이 되어 버렸다. 그러하기에 죽음의 강이 아닌 ‘생명의 강’을 건너 영원한 영적인 땅을 얻게 하신 성삼위와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담대함으로 행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신 성삼위와 주님께 진실로 감사드린다.




조회수
125
좋아요
1
댓글
0
날짜
10/11/2020

다른 칼럼의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