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of RGO 24! 'Although I am lacking and my writing is only worth as much as 'three cents...' I share the Sunday messages and interpret them with 'the language of the world.''

칼럼_연재칼럼_Three Cents Column

인식, 소통 그리고 사연

사람들간 서로에 대한 인식은 주로 ‘소통’을 통해 형성됩니다.
잘 못 된 소통은 잘 못 된 인식관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소통’ 은 '일련의 과정(Process)'입니다.
화자의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마음)’은 코딩(Coding) 과정을 거쳐 청자에게 전달됩니다.
이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됩니다. 말 하고 나서도 이게 과연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나의 생각(마음)이 맞는 건지 스스로도 자신을 못 합니다.

바로 이 ‘코딩의 오류’는 잘 못 된 소통을 통해 잘 못 된 인식을 하게 만드는 첫 번째 오류입니다.

화자의 코딩이 비교적 정확하게 되었다 해도 청자 입장에서의 디코딩(Decoding) 오류가 또 있습니다.

내가 분명히 야채 ‘오이’를 전달했다 해도 청자가 어떤 사유에서 건 숫자 ‘5와 2’로 잘 못 인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자의 ‘디코딩 오류’는 화자로서는 ‘코딩의 오류’ 보다 훨씬 더 어떻게 하기 힘든 영역, 내 손을 떠나 버린 영역입니다.

청자가 정확히 내가 원하는 ‘오이’로 인식하게 하려면 화자는 앞 뒤 ‘사연(Story)’을 함께 말해줘야 합니다.
자기가 지금 배가 고픈 상태이며 무엇보다 시원한 오이 냉국을 먹고 싶은....

현재 자신의이사연(이야기)과 함께 ‘오이’를 전하면 청자가 이를 숫자 ‘52’로 잘 못 인식할 확률이 현저히 낮아질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좋은 말씀은 한마디로 못하고 시간이 걸리는 것’이며 ‘사연이 중한 것’입니다.’

선교회의 새로운 45년을 시작하는 '기도 말씀 선교의' 2024년을 필자 나름대로는 ‘소통의 해’로 정의했습니다만, 금주의 ‘온전한 인식’(2024.2.18) 말씀과 같이 외부의 선교회에 대한 잘 못 된 인식을 바로 잡기위해 선교회는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매우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월명동, 하나님의 궁(宮)’
해당 코딩은 ‘오이’를 ‘52’로 인식하는 정도로 외부 사람들로부터 매우 이상하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디코딩의 오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연’이 필요합니다.
월명동이 왜 이렇게 개발되었는지, 뿐 아니라 낙타바위, 성자바위, 기도 표적 소나무….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지경의 무수한 사연들.
이는 어떻게 마음먹고 조작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라운 사연들입니다.

이 사연들을 듣게 된다면 그 누구도 ‘오이’를 ‘52’로 오해 않고 정말 하나님의 뜻이 서린 월명동으로 제대로 인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정작 당사자인 우리도 몰랐었던 이 위대한 사연들을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누구라서 알 수 있겠습니까?


기자단들을 초대하여 월명동의 이 사연들을 듣게 하면 어떨까?
아니 원하는 누구라도 모두 오게 하여 이 사연들을 공유 해 보면 어떨까? 생각을 해 봅니다.


지난 45년 이어 온 선교활동으로 선교회의 '교리'는 이제 전체 교계의 ‘상식’과 같이 되었습니다.
‘상식’은 결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추진력으로 끌어 쓸 수 없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회는 ‘상식’을 넘어서는 생생한 하늘과의 ‘사연’들이 차고 넘칩니다.
이것에서 후반 45년의 새로운 추진력을 얻어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메시야’, ‘신부의 사랑’ ….
선교회는 나름 제대로 코딩한다고 했었지만, 안타깝게 여전히 수많은 청자들의 ‘디코딩 오류’가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이를 바로잡고 ‘온전히 인식’하게 해 줄 ‘스토리’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임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사연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


이 ‘증인’은 뛰어난 교리 설교자, 이론의 강론가가 아니라 '사연'들에 대한 '스토리텔러(Story teller)'인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회수
2,551
좋아요
3
댓글
0
날짜
2/18/2024

다른 칼럼의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