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석 목사는 10대 때 방황 길에 접어들면서 인생 문제에 부딪히며 살아야 했다.
머리 속에서 겪는 고통은 누가 곁에서 치료한다고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정신적인 고뇌는 뼈가 쑤시고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이는 오직 겪어본 자만이 아는 고통이었다.
첫째, 달동네에 사는 가난과 빈부격차에서 오는 고통.
둘째, 못 배운 고통.
셋째, 외롭고 쓸쓸하고 적적한 두메산골에서 사는 환경의 고통.
넷째, 못생겼다는 콤플렉스.
다섯째, 말더듬이로 인한 언어의 장벽도 고통.
여섯 번째, 자기 마음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무지를 개탄하는 고통.
일곱 번째, 인생의 진로 고민.
여덟 번째, 가정에서 부모 형제들로부터 무시를 당할 때마다 받는 소외감.
아홉 번째, 주변 사람들로부터 초라한 모습에 대한 무시당함.
이렇게 심적 고통이 엄청나게 컸다. 그 당시 아무도 정명석 목사를 칭찬하며 앞날의 희망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이 그에게 희망적인 얘기를 해주었다. 그 때로써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대전 시외버스 주차장 옆에 있는 천주교회의 담장 앞에 앉아 점을 치는 한 노인이었다.
어느 날, 정명석 목사가 그 근방을 지나갈 때 그 노인이 오라고 하더니 정명석 목사의 손을 덥석 잡고서 손금을 봐주었다. 그 노인은 손금을 보고서 아주 많이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젊은이의 앞날을 보니 세계를 한 나라같이 가소롭게 보며 다스릴 자야.”라고 하였다. 정명석 목사는 말도 안 된다면서 “저, 바쁜 사람입니다. 시간이 없어요. 제가 보고 싶어 본 것은 아니지만 복채나 받으세요.”하고 3백 원을 드렸다. 노인은 화를 벌컥 내면서 돈을 받으려고 본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오히려 고함을 쳤다. 그리고 큰 사람이 왜 그렇게 사람을 대하느냐고 꾸중까지 했다.
“나중에 젊은이가 세계를 누비며 돌아다닐 때 분명 내 얘기를 할 거요. 그렇게 시간이 아까우면 가던 길이나 가보시오.”했다. 그리고 자기는 신에 감동되어 말했을 뿐이라고 했다. 정명석 목사는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노인은 하늘의 순천자(順天者)가 될 때 성공할 수 있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 당시 정명석 목사는 노방 전도를 하며 전국을 혼자 돌아다녔는데 그 날은 공주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그 노인은 중얼거리며 “내 15년 동안 이 자리에서 점을 보며 많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같이 큰 점괘가 나온 자는 처음이요.”하고 말했다.
정명석 목사는 조용히 물었다.
“제 손바닥에서 뭘 보았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노인은 “당신 손바닥에 큰 대(大)자가 대궐집 대문짝만하지 않소! 한번 보쇼.”했다.
그 말을 듣고 정명석 목사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정말로 손바닥에는 한문으로 대문짝만하게 큰 대(大)자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보였다. 잘된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복채를 안 받는다고 하기에 대신 이야기 벗이 되어 주었다. 정명석 목사는 마음에 감동이 되어 근방에 포장마차로 모시고 가서 막걸리 한 잔을 대접했고, 그 노인은 답례로 달걀을 몇 개 사주었다.
정명석 목사는 그 노인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내 체격에 뭘 하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복채 때문에 좋게 이야기한 거 아닙니까?”
“여봐, 젊은이가 지나갈 때 무겁게 앉아있던 내 엉덩이가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졌소.”
노인은 정명석 목사의 양어깨를 보고 놀랐다고 했다. 양어깨를 보니 그 어깨 밑으로 만인이 고개를 숙이며 올 것이라고 깨달아졌기로 쫓아가서 반갑게 맞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이윽고 노인은 정명석 목사에게 지금은 뭘 하느냐고 물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며 많은 생명으로 하나님을 믿게 한다고 했다. 그러자 노인은 지금 당신이 큰일을 하고 있는데 왜 자신을 모르냐고 말하며, 얼마 안 있으면 외국으로 바삐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갔다 한다고 했다. 그 당시 정명석 목사가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외국으로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할 일이 없었다.
오늘에 알고 보니 하나님은 노인을 통해서 정명석 목사의 앞날을 암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명석 목사는 하나님이 만물을 통해, 동물을 통해서도 계시하는데 사람을 통해서도 계시함을 몰랐다. 게다가 점쟁이를 좋게 보지 않았고 또 신빙성이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정명석 목사를 바보 취급할 때, 그 노인 한 분만이 정명석 목사의 앞날을 점치며 잘된다고 하면서 바보 취급을 하지 않았다.
사실 10대 초반부터 정명석 목사는 무척 생각이 많았다.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았다. 특히 고생이 많을 때마다 정명석 목사의 생각은 더 깊어만 갔다. 잘 살고 잘 먹고, 좋은 환경, 좋은 집에서 살았다면 아마도 그렇게 생각이 깊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명석 목사가 사는 지역은 누가 지금 가보아도 첩첩산중이다. 정명석 목사는 인생을 살면서 머리가 아프고 골치가 아플 때마다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무릎을 꿇고 명상도 하고 기도도 하며 인생을 통탄해하며 울며불며 소리를 지르며 기도했다.
그러면 그 마음에 먹장구름은 잠시나마 사라졌다. 밤이 깊도록 기도하고 해가 뜨면 계곡에 들어가 열매를 따 먹고 낮에는 성경을 읽었고, 밤이 되면 굴에 들어가 희미한 호롱불을 켜놓고 개인과 가정, 민족 그리고 세계를 위해 기도했다. 비록 정명석 목사 자신은 배고픈 환경에다 초라한 존재였지만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인생의 허무함을 알게 되었고, 무지 속에 하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정명석 목사가 굴속과 대둔산 용문골 절벽 위에서 기도하며 보낸 시간은 어느덧 수십 년이 흘러갔다. 영하 15도 이상의 추위에도 결사적인 집념과 행동으로 이겨냈다. 특히 다리골 기도굴은 광산에 쓰이던 굴인데 기도 장소로 많이 이용했다. 지금 그 굴은 정명석 목사의 제자들이 너무도 많이 오가서 닳고 닳았다.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