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석 목사_정명석 목사

정명석 목사와 베트남 전쟁 part.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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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은 크게 3개의 전쟁으로 나뉜다. 약 100년 동안 프랑스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던 베트남이 1946년부터 1954 년까지 프랑스와 싸운 전쟁을 1차 베트남전쟁(독립 전쟁)이라고 하고, 독립된 베트남의 공산주의화를 막기 위해 1964년 부터 1973년까지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8개 국가가 남베트남에 파병되어 소련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베트남과 싸운 것 12차 베트남전쟁(자유수호 전쟁, 그리고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싸운 것이 3차 베트남전쟁 (통일 전쟁)이다.
이 중에서 한국은 2차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다. 즉베트남의 자유 수호를 위해 국군 창설 이후 처음으로 해외에 파병되어 미국, 호주, 뉴질랜드, 대만 등 여러 국가와 함께 세계 평화 지원군으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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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 서울, 백마부대 시가행진 ⓒ만남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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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석 총재는 1966년 2월 23일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다가 1966년 8월 30일부터 1967년 9월 24일까지 13개월 동안 1차 파월(越)되었고, 5개월 동안 일시 귀국하였다가 1968년 2월 18일부터 1969년 3월 4일까지 13개월 동안 2차 파월되었다.
당시 36개월의 군생활 대부분을 인간의 생사(生死)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보낸 총재는 깊은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삶에 대한 고뇌와 전장에서의 극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총재의 회고록인 전쟁은 잔인했다. 사랑과 평화 다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책의 이야기들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너무나 극적인 내용이라, 어떤 이는 '과연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필자는 베트남전쟁을 오랜 기간 연구해 온 군사 전문가로서, 총재의 베트남전쟁 참전 실상을 각종 전쟁 역사 자료 와 당시 참전한 군인들의 증언 등을 통해 조명하려고 한다. 먼저는 정명석 총재의 끊임없는 기도와 극적인 생명 사랑의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그가 속한 부대에 주신 생명 축복에 대해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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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부대를 태우고 부산항에서 베트남으로 떠나는 가피 호 ⓒ만남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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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약 32만 5천 명이 베트남에 파병되었으며, 그중에 서 안타깝게도 약 5천여 명이 전쟁 중 사망 하였다. 10년의 파병 기간 중 한국군이 가 장 치열하게 전투했던 기간이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약 4년 동안인데, 바로 총재의 파월 기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기간에만 사망한 한국군이 약 3,300명이다. 정명석 총재는 백마 9사단 28연대 1대대 3중대 1소 대 2분대원으로 베트남전쟁이 가장 극렬했던 시기에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한국군은 전투 부대가 파병된 1965년부 터 1972년까지 8년 동안 군단급 작전 4회 등 대대급 이상 대(大)부대 작전은 1,175 회를 하였고, 중대급 이하 소(小)부대 작 전은 자그마치 약 57만 회를 하였다. 작전 횟수를 소대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1년에 평균 약 120여 회의 작전을 했는데, 정명 석 총재가 속한 3중대는 연대의 '기동타 격 중대"로서 다른 부대보다 배 이상 많 은 전투를 했다는 기록을 볼 때 1년에 약 200회, 파월 기간 3년 동안에는 어림잡아 600회 이상의 작전을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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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수백 번의 작전을 하니 전투 중 사상자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군의 전사자가 5천여 명으로 적 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군 중 가장 작전을 많이 한 부대가 정명석 총재가 속한 백마 9사단인데, 1967년 4월에만 28연대에서 14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연대에 14개 중대가 편성되어 있는데 한 달 동안 14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으니,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평균 1개월에 중대당 1명은 죽는 셈이다. 그렇다면, 각 중대의 작전 참가 횟수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1년에 대략 12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정명석 총재가 속한 3중대는 군단급 대부대 작전 2회 참전과 더불어, 연대의 기동타격부대로서 수백 번 작전을 했기 때문에 다른 중대보다 전투 참가 횟수도 많고, 가장 위험한 전투에 주로 투입되어 다른 중대보다 전사자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실제로는 그가 있던 중에 3중대에는 전사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정명석 총재가 속한 3중대 1소대장이었던 최희남 예비역 대령(당시 소위)은 그의 회고록 '나의 푸른 날 베트남 전쟁터에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정명석 병사가 1차 파월 마치고 귀국한 후부터 5개월 동안 3중대에 갑작스레 인명 피해가 많았다가, 재파월 후에는 3중대에 인명 피해가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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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에서 한두 번도 아니고 3년의 전쟁 기간, 수백 번의 전투에서 소대원, 중대원 전체에 전사자가 없었다는 사실이 놀라워 당시 전투 상황을 기록한 '전투상보'를 모두 찾아보았다. 당시에 수많은 작전이 있었기에 중대급 이하 소부대 전투는 대대에서 결과만 종합하여 보고하고, 세부 사항은 대대급 이 상대부대 작전 위주로 기록하였다. 각 부대별 기록이 남아 있는 전투상보는 육군본부에서 공인한 전쟁 자료이다.

이 자료를 보면, 정명석 총재의 1차 파월 기간에 있었던 '오작교 작전', '홍길동 대작전' 등 수백 번의 작전에서 다른 중대에서는 전사자가 발생하였으나, 3중대에는 전사자가 없었다. 3중대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그야말로 백전백승의 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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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석 총재가 파월된 기간에는 소속 중대에 전사자가 한 명도 없었다. 같이 작전 나간 3중대 전우들과 함께(우측에서 세 번째, 정명석 총재) ⓒ만남과대화



그러나 정명석 총재가 귀국한 이후 3중대는 수십 번의 작전에서 계속 패배하였고, 급기야 1967년 10월 '닌호아 작전'에서 한꺼번에 20명이 사망하였다. 또, 정명석 총재가 2차 파월되기 직전인 1968년 2월에도 '혼바산 수색 작전'에서 4명이 사망하였다.
정명석 총재가 다시 베트남 전쟁터에 파병되었다고 중대장에게 신고하러 갔을 때, 당시 3중대 정연우 중대장이 부하를 잃은 슬픔에 울고 있었다고 총재는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정명석 총재는 중대장에게 "내가 베트남 전쟁터에 있었던 13개월 동안 우리 중대는 한 번도 패배한 일이 없었고, 늘 승리하였다. 이제 내가 다시 왔으니 내가 철통같 이 믿는 하나님께서 우리 중대를 다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담대하게 말했다. 이에 중대장은 "정 병장 같은 용감한 자가 왔으니 힘이 난다”라고 하였는데실제로 총재의 2차 파월 이후에는 다시 3중대에 전사자가 발생하지 않고 연전연승하였다.

전투상보에 기록된 내용을 대대급 이상 대부대 작전 위주로 3중대 기록만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투상보 기록 중 정명석 총재 파월 이력과 소속 3중대의 전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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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석 총재의 베트남전쟁 참전 회고록 <전쟁은 잔인했다.사랑과 평화다(1~4) - 도서 명문,2018> ⓒ만남과대화



전쟁과 그 승패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정명석 총재는 3년 동안 베트남 전쟁터에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적이라도 죽이지 않고, 한국군은 물론 적군의 생명을 위해 기도해 주면서 최선을 다해 평화의 전쟁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목숨 걸고 완벽하게 지킨 총재의 행함을 보시고 총재의 생 명은 물론 그가 속한 3중대 동료 부대원들의 생명도 살려 주셨고, 정명석 총재가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 부대가 연전연 승하는 신화의 부대가 되도록 축복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졌던 구약성경의 역사처럼, 베트남 전쟁터에서도 정명석 총재가 같이 있을 때는 부대원 전부가 생명의 보호를 받아 승리하였고, 그가 귀국하여 같이 있지 않을 때는 패배와 고통이 연속되었다. 그가 곧 승리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표상으로 세워 역사하시는 시대 사명자와 함께하고 있는 섭리사, 이 역사를 따라가는 섭리인들은 그의 기도와 조건으로 생명의 축복, 승리의 기쁨이 항상 넘쳐남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

1) 베트남전쟁 : '월남'은 '베트남'의 음역어로, 최근에는 '베트남'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2) 기동 타격 중대 : 연대에서 1개의 중대를 지정, 유사시 즉각 출동하여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로 운용하는데,이를 기동 타격 중대라 한다. 24시간 항상 출동 준비를 갖춘 부대이다.

3) 오작교 작전: 1967년 3월 8일부터 5월 31일까지 2개 사단(맹호부대,백마부대)이 남북으로 연결하는 작전으로,한국군 최초의 군단급 규모 작전이다.

4) 홍길동 대작전 : 1967년 7월 9일부터 8월 26일까지 48일 동안 벌인, 한국군 두 번째 군단급 규모 작전이다. 이는 대한민국 국군의 큰 성과로 기록되고 있다.

5) 닌호아 작전 : 1967년 10월 24부터 28일까지 진행된 작전으로, 작전은 성공했으나 아군의 피해가 컸다.

6) 전과는 적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은 것을 말한다.

7) 전쟁터에서 어떻게 평화의 전쟁을 실펀했는지, 그 구체적인 사례는 앞으로 연재하면서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글 - 주동영(베트남전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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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