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한사코!!!
제가 참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한사(限死)’ 즉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염두에 두고 무엇인가를 해 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 고집을 뜻합니다.
고사성어의 배수진(背水陣)과 같다고 봐도 되겠고, 죽기를 각오하고 천년에 한 번 오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 뜻을 이룬다는 천재일우(千載一遇)와도 상통합니다. 한사코 뜻을 다 이루고 가신 예수님은 어떻게 ‘다 이루고’ 가셨을까요?
예수님은 기존의 유대인들이 기대(할 것을 하는 것) 했던 방식과 매우 다르게 역사를 펴신 분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렸던 방식의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치인의 잘못을 성토하던 정의로운(?) 세례 요한에게 도대체 왜 광야에 나갔는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갔는지 꾸짖으십니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며 지배 국가의 세금정책을 돕는 듯한 인상을 남기셨습니다. 민족해방의 선구자, 정치적 메시아(정치적 활동)를 기다리던 이들에게 적잖은 실망감을 주셨음 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정치뿐 아닙니다. 유대교가 정한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안식일도 마음대로 범하시고(?), 배고픈 제자들이 성전의 성물을 먹는 불경한 상황에서도 무엇인가 조치를 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해야 할 것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모습, 도무지 종교의 주인, 메시아로서 이해될 수 없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본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본인과 같이 뭔가를 ‘하려 하지 않는’ 삶을 종용하십니다.한 예로써 많은 것을 제대로 준비하고자 분주한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꾸짖으셨지만 그저 예수 앞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있는 여유로운(혹은 게으른) 마리아는 ‘잘 했다’ 칭찬하십니다.
심지어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농사하지 않으며 곡식 모아 곳간 안에 들인 것이 없어도 하늘이 먹여 주신다.”고…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계 문제에 대해서조차 관심을 두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하려고 하면 수도 없이 할 것들이 번져나가 차고 넘쳐 나게 됩니다. ‘하고자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욕(欲)인데 이것이 욕(慾)이 되며 곧 번뇌(煩惱)가 되는 것입니다.
번뇌에 사로잡힌 중생들에게 그 벗어남(解脫)을 강조하던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인위적으로, 억지로 하려 말 것’을 강조하던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해야 할 것 같은 많은 일들을 하지 말도록 가르치신 예수께서는 무엇을 ‘다 이루셨다.’ 하셨던 것일까요?정치든 종교든 심지어 생계를 위한 기본적인 활동과 노력에도 관심을 갖지 말라던 예수님은 오직 그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 이것을 행하라 하셨습니다. 흐르는 물을 갖고 억지로 뭔가를 하려고 분수를 만들어 물을 쏘아 올려도 보고, 물을 가두어 저수지를 만들어 봅니다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순리(하늘 뜻)따라 낮은대로 낮은대로 흘러, 가장 낮아진 그 곳에 도달한 물들이야 말로 망망 대해 바다를 이루는 그 경지를 말씀 하신 것이 아닐까요?
실 다발을 한 움큼 움켜 쥐고 바늘 귀에 쑤셔 넣어 그 중에 하나라도 실이 꿰어 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 하나 붙잡고 침 발라가며 최대한 가늘고 곧게 만들고 바늘 귀를 뚫어지게 쳐다 보면서 꿰어야 바느질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을 이루는’ 것이 아닌 정말 중요한 ‘그 일’을 ‘다 이루는’ 역사! 진정 무엇인가를 ‘다 이루고’ 싶다면 당장에 ‘무엇을 안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온갖 ‘해야 할 것’ 처럼 보여지는 일들로 빚어 진 모든 ‘번뇌’를 걷어 내고 남아 있는 그 본질적인 일(우리의 본업). 그 하나에, 이번만큼은 집중해서 ‘한사코’ 이뤄야 합니다. 무룻 바다를 보려는 자 ‘순리(오직 그 나라와 그 의)’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