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of RGO 24! 'Although I am lacking and my writing is only worth as much as 'three cents...' I share the Sunday messages and interpret them with 'the language of the world.''

칼럼_연재칼럼_Three Cents Column

그는 그렇게 메시야가 되셨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전 유럽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실화라고 합니다.


한 공동주택에서 여인이 그의 연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한 사건인데,
폭행이 행해졌던 50분이나 되는 긴 시간, 피해 여인은 내내 비명을 질렀지만 이웃 중 누구도 그 소리를 듣고 여인을 도우러 나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건이 정리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한 사회 단체에서 그 방 바로 아래층 방을 빌려 사건이 일어났던 때와 비슷한 시간대,
악기인 '드럼'을 두드려 비슷한 데시빌(db)의 '소음'을 만들었더니 이 번에는 채 2분도 지나지 않아 이웃들이 몰려 와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화가 난 이웃들 앞에서...


'그 날'에도 오늘과 같이 2분, 아니 20분, 40분이 지났던 때에라도 여러분들이 이렇게 '행동'하고 나섰더라면 천하와도 바꿀 수 없을 귀한 한 생명을 살릴 수도 있었을텐데...
'실험'을 했던 단체의 일원이 문 앞에 늘어 선 이웃들을 향 해 '드럼 소동'의 진상을 설명하고 나니 모두가 하나같이 부끄러워하며 '그 날'에 용기 내지 못 했던 일을 후회 했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 사건을 토대로 '관성'과 '용기'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사회에서의 '신뢰관계 형성'에 관한 내용까지 떠 오르는 대로 단상(短想)들을 연결 해 봤습니다.


'부부싸움 하는 소리'와 '드럼 소리'가 분명히 다른 것은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부부사이는 간섭하면 안 되는거야'와 같은 기존의 인식관, 혹은 관습에 따라 '굳이 내가 왜? 유난스럽게... 모난 돌이 정 맞는거야' 하고,
'무리' 속에 묻어가고 싶었던 이웃들의 '침묵'은 한 생명을 상실하는 큰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다수(多數)가 그리 생각한다고 해서 또 기존의 인식관, 혹은 관습이 항상 바르고 옳은것은 결코 아닙니다.
분명히 잘 못 된 것이어도 오랜 관습과 고정관념에 의해 관성적으로 작동하기가 쉬운 것이고 이렇게 작동하기 시작한 것에 그 누구라도 'Stop!!!'을 용기 내어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집단 따돌림 현상'도 이에 대한 사례 중 하나로 설명 될 수 있습니다.
본인에게 특별히 미울 것 없는 친구를 나도 따돌리고 괴롭힘에 있어 '이건 나쁜 짓'이라 분명하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다수가 따돌리니 나도 그렇게 '무리 속에 묻혀' 함께 하는 것 입니다.  
자칫 '모난 돌'이 되어 자기 조차 '다수'로부터의 따돌림을 받게 될수 있는 위험을 굳이 감수하고 싶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 있어 더 심각한 문제의 뿌리가 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신뢰 관계를 붕괴시킬 뿐 아니라 아예 상호 '믿고 맡길 수 있는 신뢰 관계' 형성 자체가 안 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다수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안위를 위해 무리 속에 묻어 가려고나 하는 사람들을 과연 내가 어떻게 믿고 무엇이든지 안심하며 맡길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내가 죽을 수도 있을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조차 관심 없어 할 지 모를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몌시야 예수님은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간음한 여자는 돌로 치는 것이 모두가 '당연하다' 인식하는 것이며,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관습'이요, 심지어 율법으로 엄연히 정한 바 되었던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굳이 '죄 없는 자만 돌로치라'고 하셨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노라' 말씀 하셨습니다.


따돌림 당하는 친구를 위해 '이건 옳지 않은 일이다' 용기를 내어 가장 먼저 나서 준 친구처럼, 유대의 모든 전통과 인습, 인식관과 율법 앞에 '생명을 위해, 단 한 명의 생명을 위해' 용감하게 마주 설 줄 아셨던 예수님.

'생명 구원' 앞에 어떤 장애도 아랑곳 않고, 물과 불도 가리지 않고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셨던 분.

그는 그렇게 해서 간음한 여인의 메시야가 되셨고, 그 삶이 큰 울림을 타고 전해 져 우리 모두의 구원주가 되신 것입니다


정말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무리 찾아 헤매 봐도 믿고 맡길 곳, 믿고 맡길 사람이 없는 시대.
이제 다시 우리가 '주'를 기다리는것은 어쩌면 '믿고 맡기려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50분 동안의 폭행을 당하는 중에 그토록 자신을 구해 줄 한 사람을 기다렸던 여인처럼,
죄를 짓다 돌에 맞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여인처럼, 용기를 내어 나를 위해 나서 줄 단 한 사람을 그토록 기다렸듯 말입니다.


'주'께는 '축복의 손(구원의 손길)'이 있으니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려라'


신뢰가 깨진, 그래서 의지 할 곳 없는 현대 사회에 있어 가장 큰 위로와 평안을 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믿지 못 해 맡기지 않는 인생'들에는 해당 되지 않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직 주를 인정하고 믿어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 된 축복인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믿고 맡기면 불가능한 것, 꿈도 못 꾸던것까지 다 해 주실 것이니 이 놀라운 축복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조회수
133
좋아요
1
댓글
1
날짜
11/4/2019

다른 칼럼의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