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갓집은 좀 사는 집이었다.
엄마 말로는 보릿고개에도 아궁이에 연기가 보이는 것은 외갓집뿐이었다고 한다.
사랑방 다락에 올라가면 자루마다 천원 지폐가 가득하였다고 했다.
마을에서 처음으로 초가집을 헐고 판잣집으로 바꾼 것도 외갓집이 처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10년 전에도 외갓집은 엄마가 태어났을 무렵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주변 이웃들이 양옥을 올리고 인터넷을 설치할 때도 말이다.
지붕을 신식 기와로 꾸미고 흙벽을 헐어 시멘트 벽돌로 채웠다고 해도,
집 구조는 초가집 구조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안방에서 건넛방으로 가려면 개방된 마루를 지나가야 했다.
여름이면 산에서 내려온 모기떼에 뜯기고 겨울에는 얼음 바람에 살이 뜯겼다.
부엌도 실외에 있어 상에 음식을 가득 차리고 문턱을 몇 번이나 넘어가야 하는지 모른다.
사랑방과 집 사이에 외양간이 있는데 제때 똥을 치우지 않으면 냄새가 온 집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화장실이었다.
외갓집 화장실은 사랑방과 외양간 사이 안쪽에 깊이 숨어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 간신히 놓인 나무판자 두 개, 쇠 깡통 위에 쭈그러져 박혀 있는 때 묻은 두루마리 휴지,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냄새…….
밤에는 발이 빠질까 봐 걱정이었고, 낮엔 두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이었다. 사실, 밤보다 낮이 더 두려웠다.
이 모든 불편함은 외할아버지의 고집 때문이었다.
화장실을 집 안에 들일 수 없다는 그 고집,
서울에 사는 아들, 딸집에서 분명 수세식 화장실을 쓰면서 아셨을 텐데도
그 집은 그 집, 내 집은 내 집이었다.
마을에서 제일 잘사는 데도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에서 사는 셈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제 사람 살만한 집이 되려나 했더니,
5년이 지나서야 집안에 거실이 나고 다시 3년이 지나서야 화장실이 집 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만큼이나 기존 생활에 익숙했던 외삼촌의 고집이었으리라.
아마도 외숙모와 사촌 형제들이 달달 볶지 않았다면 더 늦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마루에서 잠옷 차림으로 누워 잠을 주무시고
볼일이 생기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집안 내 화장실을 잘 쓰시고 계신다.
푸세식 화장실에 만족하는 자는 수세식 화장실을 얻을 수 없고,
초가집에 만족하는 자는 양옥집을 얻을 수가 없다.
나는 어디에 만족하고 있을까?
나야말로 옛 습관, 옛 고집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