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엄마는 섣달그믐에 절대 잠을 자면 안 된다고 하셨다. 나는 눈썹이 하얗게 된다는 말에 잠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눈꺼풀은 엄마의 경고보다 더 무거웠다. 다음날 밀가루로 칠해진 눈썹을 마주하고는 으앙 울어버렸다.
이후 이것이 엄마의 장난이 아닌 세시풍속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수세’라고 하는데 이 풍속의 유래가 재밌다.
본래 사람 몸에 옥황상제가 보낸 삼시충이 기생하고 있는데, 섣달그믐이 되면 삼시충이 잠든 사람의 몸을 빠져나와 상제에게 가서 자신이 기생했던 사람의 악행을 하나하나 보고한다. 상제는 보고를 받고 그 사람의 수명을 늘릴지 단축할지 판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섣달 그믐밤을 지새운 것이다.
그러나 조상들이 삼시충의 보고를 막는 것이 핵심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날 그동안 묵었던 일들을 해나갔다.
섣달그믐이 되면 음식을 챙겨 가까운 어른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저녁에는 사당에 가서 한해를 지켜주신 조상신께 절을 올렸다. 이를 ‘묵은세배’라고 한다.
주부들은 차례 음식을 만들고 남자들은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거름을 퍼냈다. 이날은 빚을 갚고 또 빚을 받으러 다녔다.
다툼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대와 풀고 새해를 맞이했다. 어떤 이는 부엌에 정화수를 떠 놓고 한해 묵은 죄를 빌고 또 빌었다.
이렇게 조상들은 한 해 묵은 것을 하나하나 소각했다. 감사와 회개로 모든 것을 다 풀고 새해를 맞이했다.
섣달그믐은 시간을 세며 새날만을 기다리는 시끌벅적한 날이었는데, 올해는 가장 조용한 밤으로 지나갈 것 같다.
어쩌면 새해를 근사하게 맞이할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우리네 조상의 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새해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