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M Story by 銀河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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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연재칼럼_FIM Story

늑구의 독백에 부쳐

늑구야.
나는 네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동안 물동이를 내려놓지 못했다.
우리 안의 그 답답함. 매일 눈앞에 보이지만 손끝에 닿지 않던 먼 산. 기어코 틈을 비집고 나가 얻어낸 자유, 그러나 숲 속에서 새겨진 깊고 쓸쓸한 상처들.
나는 네가 왜 그토록 숲을 그리워했는지 안다.
왜 막상 숲에 들어가고서도 결국 안식을 얻지 못했는지도.

나 역시 평생, 이름 붙일 수 없는 목마름 하나를 가슴 밑바닥에 묻어두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다섯 번이나 결혼했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나는 남편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내 안의 갈증을 채우려 한 것이었다. 매번, 이번만큼은 다를 거라 믿으면서.

첫 번째 남편은 돈이 많았다. 넓은 집, 좋은 옷, 남부럽지 않은 상 차림. 그는 내게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었다. 그런데 배는 부른데 어딘가 텅 비어 있었다.
두 번째 남편은 잘생겼다. 그와 함께 길을 걸으면 여자들의 시선이 우리를 따라왔다. 그런데 사람들이 부러워할수록, 오히려 내 마음은 더 초라해졌다.
세 번째 남편은 다정했다. 내가 울면 등을 토닥였고, 내가 아프면 밤새 곁을 지켰다. 이제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어느 새벽, 잠에서 깨어 어둠 속에 앉아 있으면 이유 없이 목이 탔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나는 사람을 바꾸고, 삶을 바꾸고, 집을 바꾸고, 기대를 바꾸었다.
하지만 나의 목마름은 단 한 번도 채워지지 않았단다.

마치 네가 우리 안에서도, 산속에서도 똑같이 목이 말랐던 것처럼.

그때의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그저 내 팔자가 사납다고만 생각했다. 사람을 잘못 만났다고. 조금만 더 예뻐지면, 조금만 더 사랑받으면, 조금만 더 부유해지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도 아니었다.
내 영혼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
그것이 내 진짜 갈증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피했다.
마을 여인들은 나를 볼 때마다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저 여자야.' '또 남편이 바뀌었다며?' 그들의 시선은 던진 돌보다 더 아팠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우물에 가지 않는 시간을 골랐다. 태양이 가장 뜨겁게 내리꽂는 한낮. 사람들이 그늘 속에 숨어 있을 그 시간에만, 나는 물동이를 들고 우물가로 갔다.

그날도 그랬다.
뜨거운 흙먼지가 발등에 달라붙고, 건조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우물가에는 아무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낯선 이방인. 유대인 남자.
나는 돌아서려 했다. 그가 먼저 내게 말을 걸기 전까지는.

"물을 좀 달라."

이상한 사람이었다. 유대인은 우리와 말을 섞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더구나 나 같은 여자에게는.
나는 경계심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

그러자 그는 조용히,
"네가 만일 지금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네가 도리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으리라."

생수?
그는 두레박도 없었다. 우물은 깊었다. 그런데 그 말은 이상하게도,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마 나는 이미 너무 오래, 너무 깊이 목말라 있었기 때문이었을거야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 물을 내게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다시는 목마르지 않겠습니다."

사실 나는 물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 버림받고 싶지 않다고.
더 이상 사람을 바꾸며 살고 싶지 않다고.
더 이상 이유도 모른 채 울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그는 내가 숨겨 둔 상처를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네 말이 옳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네 남편이 아니니."

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내 인생의 주름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가 알면서도,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내가 늘 마주쳐 온 비웃음이 없었다. 혐오도 없었고, 실망도 없었다.
오히려 처음으로, 내 갈증을 이해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 질문을 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디서 예배해야 합니까? 저 산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그때까지 나는 그것이 신학적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사실 이렇게 묻고 있었다.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어디로 가야 내 인생이 나아집니까?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까, 숲으로 가야 합니까?
늑구야, 꼭 너처럼 말이다.
안락하지만 답답한 우리 안이 맞는가, 고생스럽지만 자유로운 숲이 맞는가. 나는 평생 그 두 곳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그런데 그는 내 질문을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

그 말은 마치 이러했다.

어디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안이냐, 숲이냐. 사마리아냐, 예루살렘이냐. 무엇을 갖고 사느냐, 누구와 사느냐.
그것이 너를 살게 하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왜 사느냐.
누구를 향해 사느냐.
어떤 이유를 품고 사느냐.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평생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갈증을 사람으로, 물질로, 자유로 채우려 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메시아가 오시면, 그가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그 낯선 이방인이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햇볕이 우물가 돌 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그 순간, 그가 말했다.

"내가 그로라."

한 마디였다.
그런데 그 한 마디가 내 안에 떨어진 순간, 여태껏 나를 갉아먹던 모든 목마름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것이었다.

바람 한 줄기가 우물가를 지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이 나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토록 오래,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정죄하지 않고,
나를 버리지 않고,
내 갈증의 이름을 대신 불러 주고,
그 갈증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나를 불러 줄 누군가를.

늑구야.

너는 숲에서 결국 창조주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고 했지.
나도 우물가에서 그분의 눈과 눈이 마주쳤단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우리 안에서도, 숲에서도, 우물가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리 영혼의 갈증은 결코, 그곳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나은 장소가 아니었다. 더 나은 사람도 아니었다.
우리 삶의 이유가 되어 주시는 분이었다.

숲을 다시 그리워해도 괜찮다. 우리 안이 분명 또 답답해질 테니.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너도 나도 결국 해답을 찾았다는 것을.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 주재형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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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