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서로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지 않으려면
유대인들이 기대한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면 이루어지는 곳으로,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완전하게 독립한 신정(神政)체제, 아예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이 위로부터 단박에 도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시며, 많은 유대인의 기대를 저버리(?)십니다.
정명석 목사의 설교에 따르면 ‘요나의 표적’이란 ‘이 땅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 희생으로 죽을 자신에 대한 표적’이라고 정의 하면서 ‘사랑의 표적’이었음을 강조 합니다. 사실 예수께서 베푸신 모든 표적은 ‘사랑’이 근본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첫 표적은 그 어미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것이었고,오병이어의 표적도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의 배고픔으로 인함이었으며, 나사로를 살리심은 사랑했던 마리아,마르다 삼 남매를 위함이었으며, 폭풍우를 잠재우심은 공포에 떠는 제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질병과 장애를 고쳐 주심도 측은지심(惻隱之心),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허다하되 예수께서 그 집에서 머무시기를 요청한 경우는 부자 삭개오와 로마의 백 부장 정도로, 보기에도 넉넉한 형편을 가진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 마르다 집에 거하실 때도 많은 음식 준비하는 것을 꾸짖으셨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풍찬노숙(風餐露宿)을 일삼았던 것 역시 자기와 많은 제자들을 영접하기에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이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배고파하는 제자들을 위해서는 안 그래도 미운 털 박힌 상태에서 예수를 백안시 하는 구 종교 지도자들에게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임을 굳이 드러내면서 성전의 성물을 먹게 두셨습니다.
분명 성경은 예수를 기적수행자로서 증거하고자 하지만 한 번 더 깊이 보면 사랑으로 ‘늘 병들고 가난한 우리들의 삶과 함께 호흡하는 모습’이 진면목임을 역설(力說)하고 있습니다. 함께 해 주시는 것이 최고의 표적입니다. 한 번의 대형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에서 늘 함께 해 주시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독지가가 가난으로 인해 대학생활을 포기 하고자 하는 이를 위해 장학금을 쾌척해 주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난이 대죄(大罪)인 양 자식 앞에 고개 숙인 부모야말로 그 사람이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낳아 주고 길러주면서 그 삶 가운데 사랑으로 함께해 주신 분입니다. 어떤 사랑이 더 큰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명석 목사를 여전히 존경하고 따르는 이유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위대한 진리의 말씀을 해 주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 하셨고, 일일이 먹을 것을 나눠주시며, 이 같이 무더운 여름 날 한 사람 한 사람 등목을 쳐 주시며 늘 우리의 삶에서 함께 해 주신 그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강대상에서 말씀을 외치는 시간이 아니면 나머지 모든 시간은 우리들과 함께 하셨던 그 모습. 그 속에서 ‘예수의 삶’을 연상하게 하는 일들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늘 함께 해 주는 사랑’은 겨울에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따뜻한 느낌’이 오다가, 오랫동안 있으면 신경이 둔해져서 더 이상 그 따뜻함을 못 느끼는 것 같이 못 느끼게 됩니다. 상실하고 나서야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안타까운 사랑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가 자라서 싹을 내고 또 성장하여 각종 새들도 깃들 수 있을 정도의 거목이 되어 가는 과정과 같이 그렇게 이루어 지는 것 이라고… 늘 일상 가운데 잔잔한 사랑으로 매일매일 함께 해 주시는 위대한 표적의 하늘 역사, 이와 같이 지상 천국의 이상을 실현하시는 하늘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옛 시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실수를 다시 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