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局長がお届けする3文(もん)コラム!3文くらいの安っぽい文章の実力ですが・・・世の中の言葉で解いた主日の御言葉をアップします。
기독교 복음 선교회 설립 초기,
창립자 정명석 목사께서는 소위 ‘전통가요’에 가사를 바꿔 붙여 하늘을 찬양하였습니다.
일부 다른 교단에서는 이를 두고 ‘지극히 세속적’이라는 혹평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사실 정명석 목사께서는 찬송가를 가장 아끼고
즐겨 불렀으나 선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늘고,
더 적극적으로 세인들에게 다가서기 위한 일환으로 모두가 익숙한 전통가요의 형식을 빌어 찬양곡으로 쓰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 실제로 그가 어떻게(전통가요를 통해) 하늘 향해 찬양 드리는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그 간절하고 정성스러운 '행동'을 보았다면 그 멜로디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로 시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거룩하게 성별(聖別)되었다는 ‘찬송가’도 따지고 보면 그 유래는 매우 다양한
장르(지극히 세속적인 것을 포함)에서 온 것이며, 이를 여러 사람들이 ‘협상’하는 과정을 통해 취사선택하여 엮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예수’도 피조물의 하나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신성한 신(神) 그 자체셨는지 ‘논쟁(말 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설’도 신약을 공인한 니케아 공의회에서 '협상'을 통해 만든 '논쟁'의
산물입니다.
또한 오늘 날까지 성수(聖守)해야 하는 '주일'이 '일요일'로 결정 된 것도 단일 종교로의 통합에 대한 야심을 가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태양신 아폴로 숭배일(Sunday)과 한 데 묶어 져, 라오디게아 공의회의 협상 과정을 통해 결정 된 것입니다. (주일을 '일요일'로 정한 것이 우상숭배의 일면이라며 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주요 교리인 종파도 있습니다.)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 후에는 성경 보급이 확대 되면서 더 많은 '말 들'(논쟁)이 쏟아지며, 교리 마찰이 극심한 지경까지 이르게 되니 평신도 성경읽기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고,
종교재판을 통해 ‘마녀사냥’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 ‘말’만 무성한 것을 두고 카톨릭은 아예
문맹(文盲)을 권하기까지 하여, 한 때 카톨릭 신도의 98퍼센트가 문맹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웃지도 못 할 희극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천국’은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말 들’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의 언어를 알아 듣고 그 말씀 대로
행하며 사는 자들을 통해 나타나시며 역사하십니다.
‘노자’(老子)에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로 표현 되는 도(道)는 이미 ‘상도'(常道, 영원한, 참 된) 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도를 깨달아 그 안에 내재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그 사고방식과 행동이 일반인들과 판이하게 달라져,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우며, 또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길가에 굴러 다니는 동물의
배설물에도 도(道)가 있음을 알고, 찾아 볼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른 것입니다. 이 때 부터는 굳이 성(聖)과 속(俗)도 따로 구분지어 '논쟁'(말만 무성한)하는 일에 끼일 필요 조차 없는 것입니다.
찬송가 목록에 들어 가 있는 곡이든, TV나 라디오에서 아무렇게나 흘러 나오는
통속적인 곡조이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고,
정말 하늘 앞에 찬양, 영광 돌리려는 진정한 마음을 담은 그 ‘행위’가 ‘말’이 되어 하늘로 전해질 따름입니다.
필자가 좋아하여 암송하고 있는 이백(李白)의
시 중에 ‘산중문답(山中問答)’이 있습니다.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누군가 내게 '어찌하여 이 깊은 산 중에 묻혀
사냐' 물으면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그저 웃으며 '말' 대답을 않지만 마음은
절로 한가로워 지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도화 뜬 맑은 물이 아련히 사라지는 이 곳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에 나는 살고 있다네
누군가 나에게 '왜 이 역사에 남아있냐' 묻는다면
굳이 이유를 들어 '말'로 설명하려 않겠지만…
‘산중문답’ 시의 주인공이 되어 사는 이 즐거운 '삶'(행동)을 숨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