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삶 가운데 상호 소통되고 교감하여 서로 '아는 것'에 대한 범위와 정도가 '관계'의 범주를 결정 짓습니다.
예를들어 집 주인과 매일 방문하여 집 안 청소를 해 주는 가사 도우미가 상호 교감하고 알아야 하는 것은 주인이 희망하는 집 안의 청결 수준과 각 물건들이 어디에 어떻게 정리되어 있어야 하는 지 그 정돈 된 상태에 대한 정보 정도일 것입니다.
부모 자식간 교감 하고 서로 알아야 할 정보의 범위는 더 깊고 광범위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집 안의 청결 수준과 정돈 된 상태 정도가 아니라 부모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이 집을 마련하게 되었는지 그 수고를 알아 주기 원할 것이며, 또 그 노고를 안다면 이를 감사하게 생각 해 주고,아울러 집도 잘 가꿔 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부부 간에는 이에서 더 나아가 집 구매에 따른 가정의 재정 상태, 부채 규모와 상환에 대한 추 후 계획까지, 집과 관련 된 모든 정보를 교감하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관계란, 결국 서로 '아는 것'이 상당 부분 같아 지는 것이며, 이를 토대로 '삶을 송두리째 교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사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내가 '아는 수준'만큼 생각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며 그 '관계'의 수준이 각각 다르게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아는 것'의 차원에 따라 그 관계 수준이 결정 될 것입니다.
구약시대 내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알 수 있는 수준은 종(Servant)의 차원이고,
신약시대는 부모 자식간의 정도, 성약의 시대는 부부의 관계가 된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내가 하늘에 대해 더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이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단.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하늘의 생각과 계획은 인간의 그것과는 도저히 비교 될 수 없이 차원이 높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리라.'
이는 '관계'의 범주를 논하는 차원이 아닌 인간과 신으로서 태생적인 한계를 명시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이해되고 예상 되는 일,즉 내가 '알 만한'수준은 '인간'을 벗어날 수 없는 '평범'에 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늘의 역사는 내가 이해 할 수 없고 나의 수준으로서는 예상이 안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표현 될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하늘 역사의 길을 간다는 것은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며 가는 길인것으로 느껴 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넘어서는 '길'과 '방향'대로 가야 하는 위험(Risk)에 따른 불안,
내가 익히 잘 아는 수준의 확실한 것들을 과감히 포기하고 가야 할 것 같은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에 '부담'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 길을 가면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이 '불안'과 '부담'이 아닌
'자신이 그 길을 제대로 선택했는지 평생 의심하며 그 길을 가는 것' 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브리다》중-
이 점에서 우리가 하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에 관련 된 '신앙'이 중요하게 대두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보다 영적이어야 하는 이유도 하늘이 '아는 것'을 나도 알 수 있게 되고,
그 '뜻'이 이루어 지는 것을 보기까지 인내할 수 있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일한 이유로, 감히 꿈 꿀 수 없는것을 꿈 꾸고, 도저히 희망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하며 갈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길, 하늘 역사의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정명석 목사께서 그리도 '하늘을 내 머리로 삼고 사는 삶'을 강조하시는 이유.
그것을 진정 깨닫게 된다면 당장 내 삶을 변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