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예수교와 기독교는 엄연히 다르다.
예수교는 역사적 예수. 그의 생애와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종교이며
기독교는 그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만든 종교이다.’
한 방송에서 아주 저명한 교수께서 하신 발언입니다.
동의 여부를 떠나 한 번은 곱씹어 볼 만한 화두라고 생각 됩니다.
역사적 인물 예수께서는 그 시대를 읽어 그 시대에 해당
되는 문제를 해결해주며,
그 시대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 들과 함께 해 주신 분입니다.
병든 자 고쳐 주신 치료사
의료 시설은 부족하고 의사를 만나 보기가 힘들었던 당시.
예수께서는 아픈 자들의 각종 병들을 직접 치료 해 주셨습니다.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안식일 병 고치는 것으로 시비했던 당시 유대종교인들을 향 해 '회 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이라' 하시면서 병든 자들을 향 해 굳이 '네 죄 사함을 입었다.'는 표현으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참람한' 장면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의 친구
또, 너무나 가난하여 먹을 것이 귀한 시대(당시 로마제국에서 끼니 잇기 어려운 '빈민'의 비율이 65% 정도 였음으로 추산된다고 하니 속국인 이스라엘은 더 심했을 것임)였기에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신앙적 예수)을 일으켰습니다.
종교문서는 엄격한 사실 확인에 따른 ‘역사서’라기 보다 ‘신앙 고백서’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합니다. 이 점에서 물리적 오병이어의 기적은 없었을 것이라 추측이 됩니다만, 어떻게든 시대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에 예수(역사적 예수)는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은 틀림 없습니다.
무능력으로 써 줄 사람이 없어 뒤 늦게
일을 시작하여 1시간 밖에 일을 못 한 자에게도 그 식솔들이
먹고 살 수 있게 ‘종일 일 한 자와 동일한 일당을 쳐서 주라’ 비유로 일러 주십니다. '분배'에 대한 새로운 기준으로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을 말씀 하신 것입니다.
배고파 하는 제자들이 성전의 거룩한 음식에 손을 대는 것도 허락 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부자들에게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이 역시 당시 기득권 세력들은 수용하기 힘든 상황,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식민 시대의 혁명가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던 사회였습니다.
유대인들과 울분을 함께 하면서 하늘 방법으로
저항할 구체적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누가 한
쪽을 때리거든 나머지 뺨도
내밀라 하셨고 겉 옷을 달라고 하거든 겉 옷, 속 옷 모두 벗어 주라 하셨습니다. 오 리(2km)를 같이 가자고 하면 십 리(4km)를 동행 해 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제 변변한 재산이 없던 당시 채무자들에게
채권자는 옷을 압류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고, 로마 군이 군수물자 이동등을 이유로 함부로 길
가는 유대인들에게 ‘오리(2km)’의 부역을 강제 부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옷을 다 벗어 주고, 십 리를 가 주라는 것은 단순히 바보처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더 차원 높은 문제점의 해결 방향, 하늘의
방법을 일깨워 주신 것이라 봐야 합니다. 로마 입장에서는 분명 더 무서운 저항의 형태로 비추어 졌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예수'
당시 예수의 입장에서 가난하고 힘든 자의 편에 서기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늘 뜻에 따라, 기득권(기성 종교인, 부자, 로마의 지배자...)의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던, 그래서 종래에 결국 그 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그 길을 묵묵히 가신 이가 바로 예수십니다.
병든 자 치료 해 주시고, 배 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식민 시대 좌절에 빠진 자 하늘 방법으로 위로 해 주신 예수는 참으로 시대를 읽고 그 시대의 많은 문제점들에 대해 하늘의 해결 방법을 찾아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 역시 그 들이 있는 곳(바다, 산과 들...)으로 찾아 가서, 농장의 일, 씨 뿌리는 비유, 바다에서 고기 잡는 비유들로 하심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 맞는 '언어'와 '전달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시대의 진정한 예수교
성자의 몸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고 그의 삶을 볼 때
오늘 날에도 성삼위(성자)의 뜻이 그대로 이 시대에 살아 숨쉬는 종교,
동 시대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그런 곳이야 말로 살아 있는 ‘예수’교입니다.
이 점에서 정명석 목사께서 강조 하신 “생활 속에 도움을 주고 동행해 주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또 현대인들은 시간이 없으니 인터넷으로 그 들에게 해당되는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하신 말씀은 깊이 생각 해 보고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할 말씀입니다.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말씀'은 자칫 '도그마(Dogma)' 가 되어 버리기 쉽고,
생활 속에 도움을 주지 않고, 그 들의 삶과 동행함이 없는 '선교활동'은 살아 계신 ‘예수’를 화석(化石)으로 만드는 일이 될 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