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局長がお届けする3文(もん)コラム!3文くらいの安っぽい文章の実力ですが・・・世の中の言葉で解いた主日の御言葉をアップします。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곧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알리타(Alita)'라는 영화는 '뇌'만 살았으면 몸은 언제든 교체를 해서 죽지 않는 미래 시대를 보여 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1948~)등 많은 학자들이 놀라운 기술의 발전을 통해 반 세기, 늦더라도 1세기 이내 '인간이 죽지 않게 된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근데 영화 알리타에서도 그렸듯 악당들은 수 차례 새로운 몸으로 소위 '부활'해도 여전히 전에 하던 악당짓을 그대로 합니다.
이처럼 몸은 새로운 육신으로 부활을 거듭 하더라도 그 사람의 정신과 행동이 바뀌지 않으니 인생이 변화 되지 않습니다.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육신의 부활, 그리고 몸의 영생은 과연 진정한 인간 구원과 영원한 행복을 보장 해 줄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미래를 보여 주는 영화들이 결코 현재보다 행복하지 않은 미래를 제시하는 것은 이와 크게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불교에서 이 '근본적인 변화' 곧, 범부(凡夫)가 '부처(佛)'가 되기(해탈, 구원)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 중에서 지눌(知訥, 1158~ 1210)은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수행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먼저 큰 깨달음을 얻은 뒤, 생활 속에 점진적 수행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뜻인데,
‘오(悟)’는 햇빛을 받는 것 같이 순간에 밝아지는 것이고, ‘수(修)’는 거울을 닦는 것 같이 점차 밝게 하는 것이라 비유했습니다.
특히 '큰 깨우침'의 전제 없이 '수행'만 하는 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는 설명으로 '돈오점수'를 강조하였습니다.
공자(孔子, B.C. 551 ~ B.C. 479)역시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조문도석가사 朝聞道夕可死)라는 말을 통해
아침에 도(道)를 들을 수 있기를(돈오,아침 햇 빛을 받음 같이 밝아지기를),
또 그 길(道)을 따라 저녁까지 걸어 갈 수(점수,거울을 닦듯 수행)있기를 참으로 원했던 것 같습니다.
태초에 '말씀(빛)'이 있어 '어둠과 공허'에서 '빛과 창조'의 세계가 시작 되었듯
하나님의 말씀, 아들의 음성을 듣는 순간이 '돈오(頓悟)', '문도(聞道)'에 해당 된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인간의 것인가 신이 주신 말씀인가에 따라 그 수준은 천양지차일 것입니다.
'신의 말씀'을 깊이 받아 들이는 깨달음의 그 순간, 홀연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부활) 되는 것입니다.
이 '신의 말씀'은 다시 시대에 따라서 그 차원이 또 달라집니다.
아들의 말씀을 들으면 아들이 되는 부활로, 신부의 말씀을 들으면 신부의 권세를 받는 부활로 변화 됩니다.
때에 따라 역사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역사이니 이는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러하니 각 시대에 맞는 '빛'을 받아 '돈오(頓悟)', '문도(聞道)'하는 것이 참으로 중합니다.
하지만 '돈오(頓悟)'함으로 단번에 부처가 되거나, 일시에 구원이 완성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후 그 '말씀을 행함' 곧 해야 할 일을 하는 것(漸修 ,行道)이 반드시 뒤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받은 '빛'을 상실하게 되어 다시 사망으로 옮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를두고 정명석 목사께서는 "해야할 일 않는 것이 죽음이다"는 말씀으로 밝히 일러 주셨습니다.
시대, 때에 따라 주시는 환한 태양 빛 같은 하늘로 부터의 새 역사 말씀을 한껏 들어 깨닫고,
이제 시대에 맞는 일, 새 역사의 새 일을 삶 속에서 거울을 닦듯 꾸준히 행할 수 있다면
지눌이 제시했던 돈오점수를 이루는 삶,
공자의 말씀 같이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
진정한 '부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육도 영도 사망권에서 생명권으로 나오는 것이다.
살아나는 법칙은 주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