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우물가의 여인과 가상(架上) 강도의 이야기
제게 신약 성서상 ‘예수’와 사람들이 만난 일화 중 가장 극적인 두 장면을 꼽으라면
“내가 그로라.” 시원하게 직접 자신의 사명을 밝힌 일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당사자에 직접 구원을 확정해 주신 사건을 추천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두 장면, ‘메시아 선포’와 ‘구원의 확정’의 장면에서 예수의 상대방은 줄곧 예수와 함께했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메시아임을 선포하신 그 대상은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창녀와 다를 바 없게 여겨졌던 사마리아 여인이었고, 직접 낙원에 함께 할 것이라 구원을 베푸셨던 상대는 속된 표현으로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극악무도한 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화의 주인공들이 그물까지 집어 던지고 3년을 좇은 수제자 베드로도, 아끼던 제자 요한도 아닌, 우물가에서 예수를 처음 대하는 ‘창녀’와 십자가 상의 다 죽어가는 ‘범죄자’였던 것이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우물가의 그 여인은 누구보다 진실 된 사랑에 갈급하고,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간절함이 온몸에 사무친 이였을 것이며, 죽음의 목전에서 말로 표현 못 할 육체의 고통 속에 있던 그 강도는 ‘삶과 구원’에 대한 절박함이 너무나 애탔던, 그래서 메시아가 베풀어 주실 구원의 손길이 너무나 절실했던 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구원이 너무나 절박했던, 진심으로 사랑할 대상, 구원을 베풀어 주실 구원주가 절실했던 그들이 바로 ‘예수’의 가치성을 제대로 깨달아 안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현재’라는 삶 가운데 강력한 절박함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때를 정확히 뺏어 손에 거머쥘 수 있게 해 준 것이고, 그 간절했던 ‘현재’가 ‘결국’을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간절한 ‘현재’를 살고 있습니까?
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시대 구원주를 몰라본 무지(無知) 이면에는 굳이 메시아가 필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메시아가 필요 없을 정도의 만족스런 ‘현재’에 호의호식하던 그들의 눈에는 예수도 제 밥 그릇 뺏으려는 자 중의 한 명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절실하지 않으니 굳이 확인하는 일조차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현재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성삼위 하늘의 역사가 절실합니까?
정말 절실하다면 하늘 뜻을 찾고 깨닫는 것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새 역사는 가슴속에 성령이 불타, ‘못 할 것이 없는 역사, 주의 돛을 달고 행하니 불가능이 없는 그런 역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