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추운 겨울날 토란국 덥혀 내 놓았을 뿐인데..."
아주 짤막한 이 시(詩)의 제목을 여러분들에게 붙여 보라한다면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출근 길 모 지하철 역에서 보게 되는 이 시의 제목은 바로 '사랑'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천사 같이 행동 해도 '사랑'이 없다면 '울리는 꽹과리'라 했는데
이 시에서 노래한 '사랑'은 꽹과리 정도가 아니라 전혀 요란스럽지 않아 '사랑'이라는 제목이 어울릴까 생각할 지경으로 소박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추운 날 토란국을 만들어 놓고 님을 '소망'으로 기다리고, 와서 맛있게 먹어 줄 것을 '믿습니다'. 집으로 돌아 오는 이 역시 집에 나를 어김없이 맞아 줄 사람이 있다고 '믿으며' 따뜻한 음식 먹고 쉴 것을 '소망'하며 옵니다.
두 사람의 '믿음'과 '소망'은 '토란국'으로 대변되는 '사랑'으로 완성 되고 열매 맺습니다.
근데 이 시의 제목이 만약 '순종'(주인과 종)으로 주인의 명에 따라 토란국을 덥혀 내 놓은 것이었다면,
아니면 '신앙'이나 '숭배'(숭배자와 절대자)여서 기복을 위한 예배나 제사의 상차림이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다리는 자와 올 자, 양자간의 관계는 완연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사랑'의 시에서 양자는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입니다.
하지만 제목이 '순종'이나 '신앙'인 시에서는 수직적, 상하 관계로 바뀌어 버릴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사랑이 순종보다 낫습니다.
똑 같은 '토란국을 데워 상에 내 놓'더라도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듭니다.
'사랑'은 그 주체와 대상을 대등하게 만들면서 궁극적으로 '하나 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의 세계에서는 신과 인간이 하나이며, 그와 같이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호 대등하여 하나되고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성립 되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이 없는 양자간에는 설령 '믿음'과 '소망'은 있다하더라도 그 의미는 매우 제한적이거나 아예 없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정명석 목사께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사랑 없이 '믿음'으로만 '소망'으로만 '감사함'으로만 나아간다면,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 믿지마, 나에게 소망을 두지마, 감사하는 것도 거슬러' 라고 하실 지 모르겠다. 하나님께는 사랑이 최고다" 강조 하셨습니다.
즉자적인 듯 하면서도 새길수록 심오하고 명쾌한 이 말씀을 포이에르바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신과 인간의 통일이다. '
사랑'은 인간과 신을 동일화 하고, '신앙'은 인간과 신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이다. '
신앙'은 제한적이고, 선입견에 사로 잡혀있으며 배타적이다.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 '기독교의 본질' 중
종교의 본질은 신과 인간의 사랑입니다.
종교의 역사 역시 사랑의 역사로 그 완성 때는 믿음과 소망이 다 이루어지고 오직 '사랑'만이 영원히 남아져 가는 그런 역사가 될 것 입니다.
추운 날 제대로 데워 상에 올려 져 있는 토란국 한 그릇을 보면서 생각 해 봐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나 그 중에 제일은 언제나 변함 없이 '사랑'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