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of RGO 24! 'Although I am lacking and my writing is only worth as much as 'three cents...' I share the Sunday messages and interpret them with 'the language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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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베르테르 그리고 '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떤 경우든지 그 뒤엔 다른 남자들, 다른 여자들이 살아갈 것은 마찬가지요, 그리고 수천 년 동안 그럴 것이다.'


자신 어머니의 죽음, 자신이 살해한 아랍인의 죽음, 심지어 사형을 당해 자신이 죽게 된 때 조차
'자신'과 또 자신과 관련 된 '모든것'에 무관심하여 마치 구경꾼 처럼 인생을 산 소설 '이방인'(L’Etranger, Albert Camus)의 주인공 '뫼르소'


이 '이방인'의 작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카뮈는 소위 '부조리(Absurdity)'라는 개념을 정립하면서
'자신'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모두 '부조리의 상태'에 있고,또 '부조리한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나약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뫼르소' 의 '무관심'은 바로 이러한 '부조리'에서 나왔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은 물론 변함없이 그 궤도롤 돌고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제 낮도 밤도 없어졌다네. 세계가 온통 내 주위에서 사라져 버린 걸세.'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에게 비겁하다고 하는 것은
 마치 악성 열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정작 자신의 모든 꿈과 희망을 연인인 샤를롯테에만 두었기에 그 사랑이 좌절되자 그만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고 말았습니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젊음의 열정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서 비롯 된 것이라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오히려 '집착'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방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두 고전은 말 그대로 불후의 고전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나'와  '나를 둘러 싼 세계'(환경)를 바라보는 '관'(觀)을 제시 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자도 분명 '나'와 '나의 세계'(환경)에 대해 '무관심(뫼르소의 인생)'했거나,
아니면 특정 타자(the other, 他者 그것이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돈이든 권력이든...)에 대해 '집착(베르테르의 삶)' 하는 삶...


어쨋거나 '뫼르소(무관심)'나 '베르테르(집착)'의 사이 그 어디 쯤에 입장을 정하고 살지 않았을까 생각 해 봅니다.
('무관심'의 삶이든 '집착'의 삶이든 결국은 '허무'로 끝나고 말 것이었겠습니다만...)


'나' 와 나를 둘러싼 '환경'(세계)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나'도 잃어 버릴만큼 특징 타자에 '집착'하는것은
'나'와 '세계'에 대해 깊은 깨달음이 없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풀 한 포기 크는데도 온 우주가 돌아가야 된다'
수련원장님의 촌철살인(寸鐵殺人) 같은 이 말씀은 하나님 창조하신 이 완벽한 세계는 결코 부조리하여 '무관심'하게 봐야 할 곳이 아니며
감사와 감격함으로 경이롭게 대할 대상임과 동시에 그렇다고 풀 한 포기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으로 끝낼 일도 아니라는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풀 한 포기 위해서도 온 우주를 운영하시는 하나님 앞에 '인생'들이야 말로 얼마나 귀한 존재이겠습니까!

또한 온 우주가 그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데 내가 지극히 작고 작은 피조물들 중 하나에 집착하고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온 우주가 만들어 졌고, '나'를 위해 운행 되고 있는데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정명석 시인의 '나' 라는 시는 이 물음에 대해 멋지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한 조각 조각 배에
천년 꿈을 어여 싣고
'나'는 날마다 희망으로 노 저어 간다.


한 조각 조각배에라도 천년의 꿈을 싣고 살아야 되고

천년 꿈을 싣고 떠나는 주체는 분명하게 '나' 입니다.


이 몸 가지고
나를 위해, 가정 위해,
민족 위해, 세계 위해 천주 위해
미련도 없이 쓰고 가련다.


나 뿐 아니라 가정과 민족 그리고 세계와 천주를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며

그를 위해 사용할 도구는 '이 몸'입니다.


천년의 희망을 이룰 주체이자 동시에 수단으로서의 '나'
이는 사실 석가모니가 제시했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의 개념과 직통하는 '나'입니다.


정명석 목사께서는 이 '나'를 '하나님과 나는 1:1'이라는 말씀을 통해 자세히 풀어 주시기도 했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 되어 있는 '나' 야말로 진정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신과 연결 될 때 비로소 '나' 는 '나'와 '세계'에 대해 그 귀함을 십분 깨닫고 알아 매일 귀히 여기며 미련도 없이 쓰고 누릴 줄 아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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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4/2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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