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사람이 '본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제한 된 능력인지 모르겠습니다.
야구공과 축구공이 둥근 줄 알지 아주 작은 바이러스가 둥그런지, 반대로 아주 큰 지구가 과연 둥근 것인지는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저 먼 하늘의 별이 어떻게 생겼는지 못 보듯 제 눈 바로 위 눈썹도 볼 수 없습니다.
너무 커도, 또 작아도 너무 멀어도, 또 가까워도 못 보는 것이 인생들의 '한계'입니다.
이런 물리적 한계 외에도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 하는 데 손가락을 쳐다 보고 달을 오해하는 어리석음까지 보태어 집니다.
이 경우 '손가락'에 대해서만 오해하고 '손가락'을 잃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달'에 대해서도 오해하여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이중(二重)의 우(愚)'를 범하게 됩니다.
새로운 '지혜'를 받아 들였다가 이 '어리석음'에 의해 받은 '지혜'를 상실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고개를 돌려 '세상'을 쳐다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 가운데로)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전하라."
-마태복음 10:16
교활(狡猾)한 '이리'와 같이 '우리'를 속여 제 뱃 속만 챙기려 하는 자들로 넘쳐나고 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교활'은 사실 중국 고대 문헌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두 마리 상상 속 짐승을 말합니다.
'교(狡)'는 개의 모양에 표범의 얼룩 무늬, 소의 뿔이 머리에 나 있는 짐승입니다.
굳이 해석하자면 개도 표범도 소도 아닌 정체가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녀석입니다.
'활(猾)' 역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온 몸에는 돼지 털이 난 네 발 짐승으로 특히 몸에 뼈가 없다고 합니다.
호랑이 같은 맹수를 만나면 제 몸을 둥그렇게 말아 그 입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 가는데 뼈가 없으니 맹수는 그냥 꿀꺽 삼켜 버립니다.
하지만, 맹수의 몸 안으로 들어 간 '활'은 이 때부터 맹수의 내장을 갉아 먹으며 살다가 결국 맹수를 죽게 만듭니다.
먹이가 되어 주는 척 하지만 결국 자기의 배를 채우는, 말 그대로 '교활'한 녀석입니다.
'교'와 '활'이 이 처럼 '교활'하니 제 아무리 호랑이 같은 사람이라해도 '지혜'가 없으면 '교활'한 자들에 의해 억울함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디 지혜롭기를, 아버지여 저들로 하여금 지혜롭게 해 주소서..."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실 때 주께서 하셨던 이 사랑의 '염려와 간구'는 오늘 날 우리에게도 큰 감동으로 다가 옵니다.
분명해 보이는 인간 능력의 '한계',
달과 손가락을 구분 못 하는 '어리석음'에다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는 '교'와 활'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어리석음'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교활'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는...
'지혜'
'지혜'야 말로 우리 삶에 있어 제일 필요한 것입니다.
금주 말씀 통해 정명석 목사께서는 바로 이 '지혜'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는지
5만 지혜의 잠언을 하늘로 부터 받아 쓰신 실력으로 너무나도 명쾌하게 말씀 해 주셨습니다.
말씀 들 중 특히 돋보였던 대목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명철은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다.”는 성경 본문을 기초로
하나님이 지혜와 명철의 근본자이시며, 하나님과 일체된 자야말로 명철과 지혜를 받은 자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자기 생각보다 크게 여기고 행하는 것,
자기중심 않고, 하나님, 성령님, 성자 주를 중심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기본임을,
또 그러하기에 삼위일체, 주를 절대 흔들림 없이 사랑하는 지혜가 큰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사랑' 역시 '지혜' 속에 다 들어 있다는 말씀으로 하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사랑과 지혜를 연관 지어 말씀 해 주신 부분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더욱 분명해 진 것은...
우리의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를 위해 지혜를 주시는 성삼위를 믿고 감사하며 사랑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