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局長」的三分錢專欄時間! 局長的文筆水準或許不值「三分錢」…但還是解開主日話語後採用世上的語言撰寫成專文囉。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최장기간 스테디셀러이면서 동시에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책은 성경이며 그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 바로 ‘돈 키호테(Don Quixote)’입니다.
돈 키호테를 읽었든 그렇지 않았든 누구나 손꼽을 수 있을 대표적 명장면은 돈 키호테가 언덕 위 풍차를 괴물로 오인하여 말을 타고 돌격하다가 봉변을 당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장에 와 직접 본다면 이 언덕의 가파름이 가공(可恐)할만하여 모름지기 늙은 말 등에 올라 탄 돈 키호테의 등정은 생각보다 더 처절했고 볼품없었을 터라 보는 이들이 정말 ‘미쳤다’고 여겼을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겉으로 보면 돈 키호테는 말 그대로 망상(妄想)에 사로잡힌 ‘라만차’라는 시골 촌로(村老)에 불과하지만 그의 ‘세계관(Universe)’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는 악이 지배하는 현세를 구하려는 영웅입니다.
그가 그린 세계에서 부스럼 많은 노마(老馬)는 명마 ‘로시난테’이고 창녀들은 ‘공주’, 하인 산초판사는 곧 영주가 되실, 난세를 구하는 영웅의 믿음직한 파트너입니다.
이 황당할 지경의 이야기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새로운 ‘세계관’을 향해 나아가기란 비탈진 언덕길을 노마로 오르는 듯 무모하고 어리석어 미친 짓처럼 보이지만 결국 정말 새로운 ‘세계’를 열고 만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실제로 수많은 ‘돈 키호테’들이 인류사의 괄목할 변화와 혁신을 성취해왔습니다.
감히 날아 보겠다던 라이트형제, 계란을 직접 부화하려 했던 에디슨....
이런 이들이야말로 경악할 지경의 경사를 무릅쓰고 로시난테를 몰아 풍차를 향해 언덕으로 돌진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이 점에서 ‘돈 키호테’는 ‘돈 키호테’라는 인류사의 독보적 ‘전형’을 창조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전형 창조’는 상당 부분 성경의 원형(原形)을 재조명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보입니다.
예수께서 그려내신 '신약'이라는 새로운 ‘세계, 세계관(Universe)’
그 세계관을 두고 기득권의 사람들은 모두 참람하다고 하며 예수를 베들레헴의 이단, 미친 청년이라 치부했지만, 그의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동의한 어부, 세리, 창기들은 모두 악에서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의 제자’로, 멀지 않은 훗날 실제 ‘성인(聖人)’의 반열에 들게 되었던 것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라만차'의 '촌로'와 '베들레헴'의 '청년'이 교묘히 오버랩(Overlap) 될 지경입니다.
실제 ‘돈키호테’ 책 내용 중에 돈키호테가 스스로 자신을 정의한 구절에...
"(나 같은) ‘기사’(騎士)란 슬픔을 치유하고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처녀들을 보호하며 과부들에게 위로를 주는 일을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일을 할 수 있으매 하늘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이처럼 명예로운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어떤 불운이나 고난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라고 했던 것 같이 작품 내 '예수님'의 모습을 상당 부분 끌어당겨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 위대한 경전(성경)에서 매우 이채로운 화법으로 새로운 전형을 창조 해 내었다는 이유로 ‘돈키호테’가 ‘성경’에 버금갈 정도로 많이 읽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돈 키호테’ 라는)소설(小說)에서든 (‘신약성서’의)사실(史實)에서든 ‘새로운 세계관(신세계)’은 그것을 창조해내는 중심적인 인물(돈키호테, 예수)에게서 시작되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모여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같이 새로운 세계(관)를 열어 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기성의 기득권자들은 ‘비탈진 언덕길을 노마로 오르려는 듯 무모하고 어리석어 미친 짓 하는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라 비난하기가 쉬울 것이라는 것도 분명 해 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 때 제자들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 미움을 받고, 갖은 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당시 힘들어하는 제자들에게 ‘확실한 답’으로 제시한 예수의 말씀은...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즉, ‘끝까지 견뎌라’ 이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는 제자들을 향한 말씀일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그 스스로를 독려 하신 말씀이었을 수도 있었겠단 생각까지 듭니다.
정명석 목사께서는 ‘끝까지 하면’ 삼위가 원하시고, 예수님도 원하시는 ‘최고의 것’이 이뤄진다는 말씀인데 이 ‘최고의 것’이 바로 ‘구원(새로운 세계, 천국)’이라고 해석 하셨습니다.
이 험한 언덕길에 서서...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라 하지만 ‘돈키호테’가 겪었을 등정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가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끝까지 견디며 헤쳐나가야 한다는 엄중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마침 이 언덕 위로 힘있게 기어오르는 바람의 결을 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려 봅니다.
“주와 함께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