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있는 곳에 언제나 함께 해주셨던 하나님! 지난 날 하나님안에 희노애락의 수많았던 사연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금 두드립니다!
요한복음 10장 35절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은 신이라 하였거늘』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가 신이라 했다.
<신>은 ‘절대자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를 말한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나를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요,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라고 했다. 메시아 예수님은 절대자, 신은 아니지만 이 땅에서는 가장 신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사람이신 예수님은 과연 정말 신의 아들일까? 아니면 사람의 아들일까?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에서도 ‘예수는 누구의 아들인가’는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심지어 1세기 후반에는 “예수는 사생아”라는 주장도 있었고, 이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 신학자의 반박도 역사적 문헌에 남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예수는 누구의 아들인가?” “예수는 인간인가, 신인가”라는 물음을 사람들은 중시한다. 성령의 잉태함으로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 갓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에게 경배하기 위해 별을 따라왔다는 성경 속 동방박사의 이야기만 보아도 분명한 건 예수님은 이 땅에 초월적인 존재로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틀림없다.
정작 예수는 자신을 스스로 무엇이라 불렀을까. 예수는 평소 자신을 지칭할 때 메시아나 구원자라 하지 않았다. 다만 인자(人子)라고 불렀다. 문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인자(人子)’의 뜻은 깊다. ‘인자’가 히브리어로는 ‘Aben adam(아담의 아들)’이다. 예수는 자신을 지칭하며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정확하게 ‘아담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펴고 역사를 이루려 했다. 그런데 이들의 타락으로 인해 그 뜻이 깨어지고 말았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고, 하나님을 향한 최고 이상세계인 사랑의 뜻을 품은 천국 세계를 펴나갔더라면 보다 온전하고 완전한 세상에서 우리도 영육 간에 보다 흠없이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결국 아담과 하와 대신 두 번째 아담 격인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고 바라시던 사랑의 뜻을 야심차게 펴시려 했을지도 모른다.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진정한 믿음과 사랑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성령의 역사의 키인 셈이다.
진실로 사랑하고 정결하게 예비한 자만이 보다 차원 높은 부활과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예수님도 성경에 열 처녀 비유를 들어 많이 말씀했다.
그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등불을 준비한 자는 홀연히 신령과 진정으로 신랑의 아내로 맞는다. 그러니 기름과 등불을 준비하라. 사랑의 기름, 지혜의 등불. 천국은 슬기 있는 자가 사랑으로 맞이한다. 미련한 자는 사랑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함으로 천국을 맞이할 수 없다.
신랑 되시는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 예수를 뺏기거나 멀리하는 이유는
첫째, 사랑이 식어서다.
둘째, 가치성을 잊어서다.
셋째, 주로 인한 기쁨을 잊어서다.
처음 사랑을 잊는 이유는 신랑을 대하는 믿음이 식어서다. 또 태만하고, 기도를 안 하고, 감사 감격하지 않고, 좋아하는 마음이 식은 각종 이유 때문이다. 누구나 오랜 세월 지나가면 첫 순간은 잊히기 마련이다. 익숙해져서이기도 하고 마음에 힘이 약해져서이기도 하다. 처음 사랑을 잊는 각종 이유가 많아도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 예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신랑이시고, 동일하게 더욱 뜨거운 사랑을 퍼부어 주신다.
사랑하는 것이 나의 낙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나의 낙입니다
기쁨과 희망입니다
성령님 말씀하시기를
인생은 생각으로 살아간다 하셨지요...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생각을 하며
몸으로 마음으로
성령님 하나되어
감동의 몸으로 살아갑니다...
나의 사랑 성령님 사랑 주님 사랑
영원 영원합니다
정명석 목사가 지은 명곡의 가사를 곱씹어 보면 하나님과 성령님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 담겨 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하나님 성령님 주님 품을 떠나가면 살 수가 없다는 고백이 가슴을 적신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아간다. 사람의 핵은 뇌인데, 뇌에서 생각도, 정신도, 마음도 일어난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의 힘이 없어지고, 피곤해하고 몸도 나태해진다. 뇌가 그 영향을 받기에 그러하다. 나이가 들었더라도 목적이 강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일체 되어 살면 생각과 정신이 강할 수밖에 없다. 절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중심한 목적이 흔들리면 첫 마음, 첫 감사, 첫 사랑마저 마음속에 사라진다. 그래서 중심을 잘 잡아 흔들리지 않도록 자기 마음과 정신을 닦아야 한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마태복음 5장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성서에 기록된 ‘형상’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셀렘(Selem)’이다. 셀렘’은 본질 혹은 속성이 닮았을 때 쓰는 말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담아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아담 안에 신의 속성을 불어넣어 주셨다. 예수도 자신 안에 가득 찬 하나님의 속성, 본질이 하나님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신을 품은 인간, 인간을 품은 신인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고 본질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세상에서도 누구를 닮은 데가 있으면, 서로 잘 통하고 대화거리도 되고 기쁘기도 하다. 하나님처럼 온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처럼 자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온전하면 신이 된다. 하나님은 온전한 존재자, 완전한 존재자이시기에 하나님이 하시면 문제가 안 일어난다. 온전하고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온전히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조건이 된다.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을 믿고 절대시하는가, 자신의 마음, 믿음부터 온전한지 불완전한지 하나님 앞에 온전한 행함의 잣대를 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생각을 닮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행하면, 그것이 하나님처럼 온전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생각대로 우리가 행하면, 하나님도 우리와 같이 그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듯이, 자꾸만 하나님과 성령님 그리고 성자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를 쓴다면 더욱 온전에 가까워지리라. 믿음은 충만한데 삶을 돌아보면 미완성이라 온전하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절대 행함으로 꾸준히 도약하는 게 쉽진 않다.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음과 생각을 다 잡고 다스려가는 게 중요하다. 육적인 생각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이룰 수가 없고 창조 목적 또한 이룰 수 없다. 이를 위해 영의 생각을 배우고, 영의 정신을 받아야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생각이 초인이 되고, 영웅이 되고, 인간이 신이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