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그래도 가라
송구영신하던 때에 필자가 개인적인 깨달음으로 받은 새해의 화두는 “그래도 가라.”였습니다.
살면서 ‘그래서’ 못 가거나, ‘그래서’ 안 가게 된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금년도는 나의 상황이나 처한 여건과 관계없이 “그래도 가야 하는 해 인가 보구나.”
마음을 새로이 다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연초 며칠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가야' 될 일이 참 많았습니다.
개인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교회서도 또 개인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에서도...
‘그래도’ 가야 할 상황이 많았고, ‘그래도’ 가야 한다고 말해 줄 일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서운해도, 그래도 가라
오해받더라도, 그래도 가라
더럽고 아니꼬워도, 그래도 가라
누가 반대하고 그 길을 막아서도 그래도 가라
내 가진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그래도 가라
바쁘더라도, 그래도 가라...
사실상 ‘그래서’ 못 가는(혹은 안 가는) 수많은 사유는 ‘그 것’ 혹은 ‘그 들’ 즉 제 3자의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못 가거나, ‘그래서’ 안 가는 경우, 대개 ‘자기 실패’의 길로 전락하게 되고 마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개가 짖어 열차가 못 갔다고 하면’ 결국 짖던 개는 잠잠해지고, 못 간 열차만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갔다면, ‘그래서’ 안 갔다면 결국 나만 손해입니다.
나는 ‘나의 길’을 그저 묵묵히 가야 합니다.
‘큰 고함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물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가라.’
불경에 나오는 말처럼 그래도 가야 합니다.
‘그래도’ 말씀을 증거한 것에서 시작된 역사
어떤 사명이든, 심지어 성서에 나오는 위대한 사명자들에게 있어서도 그때 그 사명을 해야만 하는 수만 가지 이유가 있었듯, 정말 그만 두고 싶은, 혹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던 사유 또한 수만 가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금주 말씀의 본문(행1:8) 문장은 “내 증인이 되리라.” 곧 ‘선언’하심으로 끝이 납니다.
증인이 되어달라 간청하심이 아닙니다. 증인이 되어 주면 좋겠다. 희망하심도 아닙니다.
그냥 “되리라.” 선포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권능을 받게 되면 설령 제 목숨을 버려 순교하는 골고다 언덕에 다다를지언정 그리 ‘되고야 말리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하나님의 목적 하신 바를 위해 죽음으로까지 ‘증인’이 되었기에 신약은 위대한 역사로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정명석 목사께서 일군 이 섭리 역사도 삼각산에 비닐 깔아 주무시며, 제대로 끼니 못 챙겨 드시며 '그래도' 말씀을 증거하신 것에서 시작된 역사입니다.
갖은 고난 끝에 스스로 개척하신 교회에서 밀려나신 때에도, 정성을 다해 전도한 사람이 다 등을 돌려 나간 때에도 ‘그래도’ 또 증거하고 또 행함으로 오늘까지 뜻을 이어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은 주와 함께 끝까지 ‘그래도’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