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과연 '교회'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교회는 악마들이 만들었다'고 하면 제게 던질 돌을 찾는 분들이
많을것입니다.
근데 이 말을 위대한 사상가, 대 문호가 그의 작품을 통해 한 말이라고
한다면 한 번 새겨 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예수께 패배하여 옥(獄)에 갇힌 마귀들의 왕 바알세불이 어느 날
보니 자기의 결박이 풀렸고 옥문이 열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부하 마귀에게 '어떻게 내가 다시 놓이게 되었나?' 물었더니 '교회라는 것이 생겨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곳이 뭐하는 곳이냐 물으니 '거짓말 하면서 이것이 하늘의 뜻, 진리이며, 자기만이 신의 유일한 대리자라고 하면서
자기 권위를 반대하는 자들을 박해하는 곳'이라고 답 해 줍니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의 '지옥의 붕괴와 그 부흥'중 에서 발췌, 편집
하나님의 전(殿), 주님의 몸 된 곳으로서의 '교회'는 그야말로 절대적 권위를 갖습니다
하지만 절대권력은 부패한다는 말이 있듯 절대적 권위의 '교회'도 잘 못 되면 부패되는 권력으로 전락(轉落)하기 쉽습니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목사, 지도자,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배경 삼아 '주'가 아닌 '자기'만을 드러내는 이 역시 호가호위(狐假虎威)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의 마음, 행실과 맞지 않는 교회는 ‘주의 몸’ 이 아닐 뿐 아니라 '평범한 교회'도 될 수 없고 바로 ‘악마들의 창작품’이 됩니다.
시쳇말로“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는 문화가 되었으며,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에서 대기업이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교회 건물이나 재정규모가 커 졌다고 진정한
부흥이 일어 난 것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교회'가 이 전 보다 훨씬 영적으로
성숙하여 주를 중심하고, 형제들에게 더 넓은 아량을 갖게 되고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교회는 주의 몸 된 교회로서 부흥된 곳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선교회도 때가 됨에 따라 여러 지역에서 큰 교회 건축을 통해 외적 성장이 눈에 띌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형화에 따른 ‘적응기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불경에서 제시한 구도자의 참 모습으로 '천둥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도 매이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
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이 있는데,
만에 하나라도 옆 사람 방구소리에도 놀라 다투고, 그물은
고사하고 실 오라기 하나에도 서로 뒤엉켜 큰 소리를 내며, 무소의
뿔이 아닌 레밍 쥐들처럼 생각 없이 당을 짓고 우루루 몰리는 교회가 된다면 명백히 그 교회는
악마들의 작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명석 목사께서는 점 하나 있고 없고에 따라 '님'과 '남'이 되고, 점 하나의 방향에 따라 '나'와 '너'가 되듯 생각 하나, 행실 하나 맞춰 주와 100% 일치해야 하늘 몸이 되어 사는 것이며, 마음과 행실 두 가지가 정확히 맞은 때만
주와 같이 산 시간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점 하나 따지듯 세밀하게 하늘의 '마음과 행동'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 교회만이 영적 장자권을 가진 개인, 교회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큰 권위를 지닌 곳일수록, 교회가 커 질수록 더욱 자기 변화, 교회 개혁을 부단히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 개혁의 목표는 오직 하늘의 마음과 행실에 꼭
맞는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얀 후스(Jan Hus, 1372?~1415)는 거대해지고 세속화 된 교회의 개혁을
이루고자 노력했던 체코의 종교개혁가 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행실에 맞춰 사는 교회로의 개혁을 꿈 꿨으나 당시 기득권의 종교 재판을 통해 이단으로 몰려 끝내 화형을 당해 죽게 됩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세기 뒤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화형대에 오른 얀 후스가 남긴 유언이라고 합니다.
그의 이름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를 뜻한다고 하니 자신을 거위로 빗댄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100년이 지난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백조)'가 등장하여 종교개혁의 대업을 이루고 맙니다.
바로 지난 2017년이 그 종교개혁의 5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500년이 지나 새로운 희망과 감사의 해 2018년
이제 '더욱 거대해져 버린‘ 종교의 개혁을 위해서는 '백조'가 아닌 '독수리'정도가 등장하여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깊어
집니다.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아무리 태우려고 해도, 삶으려고 해도 태울 수 없고 삶을 수 없을 '독수리'의 출현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