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진리는 순리이다
‘성경의 므두셀라가 969세까지 살다가 죽었고, 아담이 930세까지 살다가 죽었다.’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께 정말 그러냐고 여쭈었더니,
“네가 살아 보면 알지 않느냐?” 하신다.
- 정명석 목사님 잠언 중 -
진리는 순리입니다.
정명석 목사님의 말씀은 너무나 순리적입니다. 상식적이고 순박해서 오히려 오해를 받을 정도로 순리적입니다. ‘순리’는 곧, ‘순천(順天)’이고 그렇지 않고 억지로 하면 ‘역천(逆天)’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는 ‘직관(直觀)’과 ‘감성(感性)’ 입니다(프레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
직관과 감성이 중요하기에 성령(聖靈)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되는 것입니다.
이 ‘직관’과 ‘감성’을 통해 인도, 불교 철학의 ‘덕’과 ‘과오’를 버린 상태, 니체의 ‘선과 악’을 뛰어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되며, 이 상태를 ‘신비(神秘)’로 정의합니다(아네자키 마사히로).
그런데 이 ‘신비’에 이르려면 추상적 이념으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교로서 대중들에게 공통으로 적용 가능한 ‘교리’와 ‘행동규범 체계’를 만드는 것,
즉 ‘신비(神秘)’가 ‘역사(歷史)’가 되기 위해서는 ‘객관(客觀)’과 ‘사실(事實)’에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땅에 발붙인 현실 속의 ‘인격’이라는 매개가 ‘신’과 ‘인간’ 사이에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우리는 ‘신인(神人)’이라 부르는데, 그 사람은 신과 교감(交感)하여 신과 닮기를 힘쓰는 인물입니다. 신약시대 예수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기 위해 ‘직관’과 ‘감성’은 그를 가능한 ‘신(神)’ 그 자체로 만들고자 했을 것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수천 명을 먹이고 남긴 일화 같은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직관적으로, 감성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위대한 신의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를 이 이야기는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정말 믿을 수 없는 판타지(Fantasy) 같은 얘기입니다.
떡을 떼는 순간 떼낸 만큼 떡이 더 자라났으며, 생선살을 뜯는 순간 또 그만큼의 살이 돋아나는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억지로 푸는 것은 현실에서도 안 이뤄지고, 세월이 더 지난다고 해도 안 이뤄집니다. 현실에서 안 이뤄지는 것, 미래에도 이뤄지지 않을 것을 참된 가르침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오병이어의 사실이 있었다고 치더라도, 당시 몇 명 배부르게 한 일회성적 이벤트가 과연 역사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군중이 예수의 말씀 통해 하늘 뜻을 깨닫고 또 많은 군중 속에서 정말 말씀의 가치를 더 깊이 있게 깨달아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여 끝까지 남은 몇 명(남은 광주리)이 다시 그 말씀을 전하는 사도의 인생으로 전환 된 것이 훨씬 더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 아직 논란이 많은 도마복음(예수님의 어록을 정리한 복음서)에도 보면 신화적 기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이 ‘깨달은 인간’으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서술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풀어야 한다
억지로 풀면 사람의 아들(人子)로서 신의 아들(神人)이 된 위대한 청년 예수의 사실(史實)은, 주술과 미신의 마법사 예수의 허구(虛構)로 전락하게 될지 모릅니다.
억지로 풀면 더 나아가 예수는 이단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구약시대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란 청년은 아직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신성모독의 이단아에 불과합니다.
‘자기 주관’, ‘자기의 목적’에 부합되는 관점으로 성경을 풀고 행하는 자는 결국 억지로 성경을 푸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도 오해하고, 말씀도 오해하고, 형제도 오해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풀어야 합니다. 곧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현실’에서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질 ‘사실’대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神)이라 하기엔 너무나 인간적인, 진리라 하기엔 너무나 소박한 바로 그것이 위대함의 참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