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음’이라는 단어는 부정적 느낌이 강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생명’을 향한 매일매일의 ‘죽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 초당 약 10만개의 세포가 죽는다고 하니, 1년 정도의 시간이면 우리 몸은 이 전의 모든
세포가 다 죽어 없어지고 완벽하게 새로운 세포들로 구성 되어 삶을 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례로 죽어가는 피부세포들은 ‘케라틴’이라는 이름의 단단한 방패를 만들어 우리
피부를 최전방에서 지켜 주어 생명을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때’가 되어 우리 몸에서 완전하게 분리되어
사라집니다.
결국, 우리의 ‘생명’은 ‘죽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며, 그럼으로써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철학도 나오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 해
봅니다.
또한 이 점에서 ‘살’과 ‘때’를 구분하기 힘든 이유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명석 목사께서 ‘살’과 ‘때’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지만, 구분하고 ‘때를 벗겨 내는 것(죽음)’이 회개라 하였으니 ‘죽음’과 ‘회개’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확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살펴보면 종의 진화는 ‘자연선택’과 ‘성 선택’에 의해 진행 되는데, 자연 선택이란 주어진 자연의 생존 환경에 대해서 잘 적응하는 종(혹은 그 특성)이 생존율이 높다는 것이며 또한 매력적인 배우자가 그
자손을 남길 수 있는 확률이 높다(성 선택)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자연선택’과 ‘성 선택’에 있어 선택 받지 못 하는 열등한 종이 ‘죽음(도태)’을 맞기에 살아 남은 자에 의한 ‘진화’가 전개 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진화’의 관점에서도 ‘죽음’의 의미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우리의 ‘생명과 진화’는 ‘죽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관점에서 ‘죽음’은 매우 쓸모 있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장황하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금주 정명석 목사께서
해 주신 말씀 때문입니다.
설교를 통해 우리의 싸움은 ‘옆에 있는 형제들을 이겨서 떨어뜨리고
성공하고 승리하기’가 아니라고 밝히셨습니다.
하나님과 주께 받은 ‘시대 말씀’과 ‘선’을
가지고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자기와 싸우고 겨루어 이기는 ‘선한 싸움’
순전히 ‘자기 할 일을 하며 자기와 싸워
이기기’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자기와 싸워 이기는 것’은 달리 표현해서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곧 ‘죽음’과 ‘회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매일 죽노라’ 자신 있게 말했던 사도 바울의 ‘사의 찬미’가 이해될 듯합니다.
사실 ‘회개’란 단어 역시도 ‘죄’와 관련 되어 있어 부정적 느낌이 강한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정명석 목사께서 말씀 하신 바 대로
이전의 일을 그만 두고, 새로운 사고와 행동을 결정 짓는 것을
회개라고 한다면 회개는 사실상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 짓는 것은 우리의
‘뇌’입니다.
이 뇌는 1,000억 개가 넘는 뉴런(Neuron)들이 상호 네트워킹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뉴런들의 접합 부위인 시냅스(Synapse)는 연결 되어 있지 않고 분리 되어 있으면서 각 시냅스간을 신경전달 ‘물질’이 옮겨가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합니다.
‘회개’는 결국 시냅스 간의 ‘연결 경로’를 바꾸고 그 전달하는 ‘물질’을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바꾼다.'
결국 인류의 문명사는 ‘물질’을 바꾸어 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정명석
목사님 표현대로면 ‘제2창조’의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놀라운 일이 우리의 뇌에서 일어
나는 것이니, ‘회개’야 말로 ‘우주’를 바꾸는 위대한 일입니다.
매일 자기를 죽이고 회개함으로써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모두 다 귀하고, 모두 다 승리자이며 성공자’가 된다는 귀한 말씀 잊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