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윤동주 시인이 저항 시인으로 불리는 것은
그가 '부끄러움'울 알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소극적인 형태의 저항이 부끄러움이지만
적극적인 저항의 시작이 또한 부끄러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은 과거를 반추해 현재 내가 결정하는 과거에
대한 태도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잘했던 모습에 비해 현재를 만족스럽게
살지 못 할 때
혹은, 과거의 잘못을 현재에 반성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과거에 한 센터에서 왕을 살듯 잘했지만, 현재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들도
과거에 많이 부족했던 것으로 현재까지
지지부진하며 의기소침해 있는 자들도 알고 보면
모두 ‘과거에 빠져 사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빠져 사는 자들에게는 ‘부끄러워함’이 필요합니다.
과거에 잘했을 때 그때 우리는 충분히 그에
대한 대우를 받았고, 행한 대로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그리 못 하고 있다면, 과거와 같은 대우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과거의 일로 현재까지 보상을 기대하고 있다면
또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잘못 했던 점을 깊이
반성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이 귀한 때에 아직도 변화되지 못한 채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최근 필자는 성경에 나오는 ‘구름’에 대해 여태와는 다른 시각으로 새롭게
접근을 해 봤습니다.
성경에 메시야는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름’은 이 땅의 오염 되었을 수도 있을 ‘물’이 태양의 힘으로 깨끗하게 정화되어 하늘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구름은 '정말 보잘것없는 수증기들...'에 지나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위에 솜털만 한 무게의 물질도 제대로 올려 놓을 수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크게 섭섭할 것 없을 수증기들.
그 존재감 없는 것들은 잘 뭉쳐 지지 않으면서
그저 모이고 뭉쳐 있는 듯, 마치 어떤 실체가 있는 듯 하게 보여지는
상태로 존재하는,
훅~ 부는 여린 바람에도 오합지졸처럼 흩어질
뿐인,
그 미미한 존재감이 구름은 아닌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구름을 타고 인자(人子)가
나타나신다.
인자의 운명이 참으로 애처롭고, 그 역정이 고달플 수 밖에 없겠다고
느껴집니다.
‘구름’은 영광스런 이름일 수도, 부끄럽고 송구스런 이름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개념인지 모르겠습니다.
과거가 어떠했든 현재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물으시는 하늘의 질문에 답을 하여야 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