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장이 들려주는 세푼칼럼! '세푼'짜리 부족한 글 솜씨로나마..... '세'상의 언어로 '푼' 주일말씀을 써 올립니다.
‘기도’로 국회를 개원한 대한민국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될 당시 한국의 기독교인은 전국민의 5%가 채 안 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제헌국회 속기록을 보면 ‘기도’로 국회를 개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헌 국회의 국회의원 거의 모두가 기독교인들이었고, 문교부 장관도 기독교인이어서 ‘미신 타파’ 운동을 시작했고, 기독교인 국방부장관은 군대 안에 군목제도의 기틀을 마련하여 기도하는 군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었을까요?
1903년 캐나다 출신의 샤프(Robert Arthur Sharp, 1872-1906) 선교사는 한국에 들어와 여자 선교사 앨리스 하몬드(Alice Hammond 한국명 ‘사애리시’)와 결혼하고 짧은 기간 동안 충청 지역에 55개의 신앙공동체를 조직하는 성과를 냅니다.
보수적 분위기가 강하였던 충남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교육사업이 적격이라고 판단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공주 최초 학교인 ‘영명학교’의 기초도 닦습니다. 샤프 선교사는 얼마 지나지 않은 1906년 논산지역으로 선교를 나갔다가 이질 균에 전염되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34세의 젋은 나이로 샤프선교사가 숨지자, 부인 사애리시 여사는 실의에 빠져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남편의 유지를 이어가고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공주에 큰 교회들을 세우는데 기여를 하며 47년 간 선교사역을 하게 됩니다. 자식도 없이 오로지 선교사와 교육사업에 전념하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소녀들을 후원하고 교육을 시켰는데 이들 중 양녀로 삼은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며 국회위원을 지낸 임영신, 한국교회 최초의 여성 목사였던 전밀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경찰서장을 지낸 노마리아, 여성교육의 선구자였던 박화숙 등이 배출 됩니다.
그리고, 영명학교에는 1906년 10월 샤프선교사의 뒤를 이어 윌리암(Frank Earl Cranston Williams, 한국명 ‘우리암‘)선교사가 부임했는데, 그도 샤프 선교사가 시작한 교육사업을 이어받으면서 물심양면으로 한국의 선교 사업에 힘씁니다. 윌리암은 첫 아들의 이름을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우광복’이라고 짓는 등 모든 아들에게 한국식 이름(광복, 흥복, 규복)을 지어 줄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습니다. .
우연같이 시작 된 위대한 역사
우광복(조지 윌리엄)은 한국에서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조부모가 있는 미 콜로라도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치고, 미 해군 군의관이 되어 한국을 찾습니다. 그 때는 한국이 해방되어 하지 장군(John Reed Hodge•1893~1963)이 군정관으로서 한국을 신탁통치 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 장군은 주변에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구사할 사람이 필요 했는데, 하지 장군이 이끈 24군단 1만여 명의 병사 가운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미군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 때 해군 군의관이었던 우광복이 아주 우연한 계기로 발탁 되면서 하지 장군의 통역관으로, 해군이 육군의 보좌관으로 특채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우광복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혼란스러운 당시 한국의 안정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지 장군은 한국 실정을 잘 아는 우광복에게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들을 추천해 달라고 합니다. 우광복의 인맥에는 영명학교와 관계 깊은 인물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군정 경무국장(경찰청장)을 지낸 조병옥(1894∼1960) 박사는 영명학교 2회 졸업생이었고, ‘코리아 타임스’ 초대 사장을 지낸 이묘묵(1902~57)은 영명학교 교사 출신이었습니다. 연희대(현 연세대) 초대 총장 백낙준(1895~1985)과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광복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논의하여 추천해 준 50명 중 48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기독교인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서 영향을 미친 결과 10년만에 한국의 기독교인 숫자는 500만이 되고, 20년 만에 1000만 성도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씨앗’이 되려는 자들이 갖춰야 할 것
젊은 나이 남편을 잃은 비극의 땅을 다시 찾아 와 일생을 희생한 사애리시 여사, 한국을 정말 사랑했던 윌리암 가정!! ‘희생’과 ‘사랑’으로 한 알의 썩어진 밀알이 되어 준 ‘씨앗’과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씨앗’의 역사는 아주 보잘것없고 미미하게 시작 되는 듯 하지만 한 알의 씨앗이라도 ‘꺾이지 않고 끝까지’, ‘썩어짐으로써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 남아’ 역사를 이어 갈 때 놀랄만한 황금벌판의 대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그 누구도 가 보지 않은 전혀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무릇 새 역사의 ‘씨앗’이 되려는 자!!
어떤 외부의 어려움과 환난에도 ‘꺾이지 않아야’ 하겠고, ‘스스로 썩어짐’으로 더 ‘역동적 생(生)을
창조’하겠다는 각오로 길을 떠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동시에 그 길의 끝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 지… 그 벅차 오르는 희망과 감격을 안고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