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of RGO 24! 'Although I am lacking and my writing is only worth as much as 'three cents...' I share the Sunday messages and interpret them with 'the language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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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公義)란 무엇인가?

“전투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런데...

“설령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도 용서받을 수 있다 해도 (급식 등)‘분배’에 실패한 지휘관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우스갯소리로 여길 수도 있을 법한 얘기지만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내용입니다.


절대 빈곤의 시대야 재론할 것도 없겠지만 빈곤의 시대를 벗어난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회 문제들 역시 (공정한)‘분배’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분배’는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인류의 큰 숙제이며 결코 쉽게 실현되기 힘든 난제입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차원에서 의미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너무나도 유명한 실험 ‘트롤리의 딜레마(Trolley Dilemma)’


“전차 기관사인 당신은 지금 시속 100㎞가 넘는 속력으로 전차를 운전 중인데 눈앞에 다섯 명의 인부가 철로에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속도가 빨라 브레이크를 잡아도 멈출 수 없는 상황. 대신 오른쪽에 비상 철로가 눈에 보이지만, 그곳에도 인부 한 명이 작업 중이다. 당신은 지금 당장 철로를 바꿀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실험을 소개했던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센델)라는 베스트셀러를 읽으면서, ‘정의(正義)에 대해 분명하게 정의(定意)하기가 정말 어렵겠다. 이는 그야말로 신의 영역이겠다.’ 결론을 냈었던 기억입니다.



금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정명석 목사께서 주신 ‘달란트 비유’ 말씀을 들으면서 과연 ‘정의, 공의’에 대한 신(神)의 입장은 무엇일지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말씀 중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하나님과 연관된 사명을 맡기시는데 각 재능대로 맡기시며, 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 그리고 개인의 인생 목적과 깊이 연관된 것이라 하셨습니다.

사실 이를 극명하게 잘 드러내 보여 주는 내용이 성경의 ‘달란트 비유’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각각 한 달란트,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맡기심은 각 사람을 ‘차별’해서 맡긴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소질, 재능대로 맡겼다는 사실입니다.


붕어빵을 만들어 팔아서 성공하는 사람과 붕어빵 프랜차이즈 사업을 해서 성공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인데 금액의 차이가 아닌 공히 2배의 성공을 거둔 것을 두고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똑같은’ 상을 부여하심으로 전혀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받은 것이 큰 만큼 감당해야 할 책임이 컸을 것이며 각자 자신들의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비로소 거둔 성공이었음을 충분히 알고 그리 대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 둘과 다섯 달란트 받은 이들이 서로 부러워하거나 시기, 질투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소질과 재능의 한계를 알고 이에 따라서 서로에게 다른 달란트를 줄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신의 영역(전지전능성에 기초한)이 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롬9:21)


전지전능하신 신께 ‘공평과 정의’를 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한 달란트든 둘이나 다섯이든) 이 역시 어차피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다는 점. 이를 무상으로 주신 주인은 애당초 회수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말 그대로 무상 증여를 해 주셨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몇 달란트를 받았든 받은 달란트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충성을 다 해야 하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음에 섭섭해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두 달란트를 만들기 위해 충성을 다 하지 않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어짐을 논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쓰일 준비가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神)의 ‘공평하고 정의로움’에 대해 완전히 의혹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충성하지 못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충성한 사람들 덕에 한 차에 동승할 수 있다.”는 말씀을 또 상고해 봐야 합니다.

이는 여태 논의되었던 ‘공의로운 분배’와 또 차원이 다른 내용입니다.


충성치 않는 사람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영역.

이러한 은혜로운 ‘분배’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오직 ‘주인(Lord)’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Lord)께서 자신이 죽기까지 충성함(충성한 사람)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충성하지 못한 사람들)를 사하고 구원에 이르게 했다(한 차에 동승)는 부분이 바로 이 놀랍고 새로운 ‘분배’의 대표적인 역사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야말로 ‘주인’이며 ‘신의 대리자’(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충성된 자여 잘했다. 설령 충성하지 못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충성한 사람들 덕에 한 차에 동승할 수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충성을 다 했거나 다소 그러하지 못 했어도...

모두에게 주시는 가장 복 된 하늘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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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2/3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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